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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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황혼의 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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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진우
황혼은 느린 박자로
하루의 마지막 악장을 쓴다
빛이 조금씩 내려앉고
그 자리에 차가운 그림자
손 끝에 젖는다
나이 듦은
거칠어진 마음 위에
잔잔한 글씨를 새긴다
어린 날의 서두름을 지우고
남은 시간을 부드럽게 쓴다
어둠이 오면
눈먼 길이 열리고
빛이 미처 닿지 못한 곳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난다
조용히 걸어가는 발자국마다
낡은 슬픔이 가벼워지고
하루의 모든 음이
한 줄의 고요로 정리될 때
나는 안다
황혼의 악장은 얼어붙었던
내 그림자가
새로운 길을 여는
가장 고요한 출발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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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을 바라보는 시인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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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황혼을 바라보는 태도부터 다르다. 저무는 시간 앞에서 흔히 드러나는 감상이나 쓸쓸함보다, 박진우 시인은 한 발 물러서서 시간을 보낸다. 황혼을 ‘느린 박자’라고 부르는 순간, 하루는 더 이상 소모된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마무리하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 이 시의 출발점에는 성찰보다 배려가 있다. 삶을 평가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결심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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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악장으로 읽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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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마지막을 ‘악장’이라 부르는 감각은 중요하다. 악장은 끝이 아니라 곡의 일부다. 하루는 실패와 성취로 나뉘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묶인다. 이 시에서 시간은 끊어지지 않는다. 낮과 밤은 단절되지 않고, 서서히 음색을 바꾼다. 삶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루를 견뎌낸 것이 아니라 살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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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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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내려앉고 그림자가 손끝에 젖는 장면은 이 시의 중요한 감각이다. 여기에는 설명이 없다. 다만 몸의 반응만 남는다. 황혼은 눈으로만 보는 풍경이 아니라, 피부에 닿는 온도다. 시간은 관념이 아니라 감각이라는 사실을 시는 이 장면에서 분명히 한다. 그래서 이 시는 읽히기보다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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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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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을 말하는 대목에서 시는 놀랄 만큼 부드럽다. 거칠어진 마음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 위에 글씨를 새길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은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흔적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간다. 이 태도에는 자기 연민도, 자기 위로도 없다. 그저 오래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수긍과 철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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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름을 내려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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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의 서두름을 지운다’는 구절은 후회의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속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다. 더 빨리 가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진 자리에서, 삶은 다른 필체를 얻는다. 남은 시간을 부드럽게 쓴다는 말은, 이제는 방향보다 감촉을 중시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이 시는 삶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패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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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길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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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보통 길을 막는다. 그러나 이 시에서 어둠은 길을 연다. ‘눈먼 길이 열린다’는 말은 역설이지만, 삶에서는 자주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이 환할 때는 오히려 자신을 놓치기 쉽다. 빛이 닿지 못한 곳에서 만나는 또 다른 나는, 실패한 자아가 아니라 그동안 외면했던 자신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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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와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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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특별한 이유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도 설명하지 않는 데 있다.
해석하지 않고, 이름 붙이지 않는다.
그저 만난다.
삶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중요해진다. 이 시는 그 지점을 정확히 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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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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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이 조용해지고 슬픔이 가벼워지는 장면에서, 시는 삶의 진짜 변화가 어디서 오는지를 보여준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삶을 끌어내리던 무게를 내려놓는다. 하루의 모든 소리가 하나의 고요로 정리될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에게 쉴 자리를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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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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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마지막 인식은 단단하다.
황혼은 끝이 아니다.
얼어붙었던 그림자가 길을 연다는 말은, 삶의 후반이 여전히 움직일 수 있음을 말한다. 다만 예전과 같은 속도는 아니다.
가장 고요한 방식으로, 가장 늦은 출발을 택한다. 이 시가 남기는 여운은 바로 여기에 있다. 느림은 멈춤이 아니라, 삶을 다시 시작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느린 황혼의 악장은 또 다른 삶의 제2악장으로 시인은 노래하면서 그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