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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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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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종록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잘못
말한다고
탓하지 마라
나 혼자
생각한다면
단편적이니
서로를
생각하여
말한다면
오해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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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혼자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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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말수가 적다. 그러나 그 적음은 빈약함이 아니라다. 오래 생각한 끝에 남겨진 최소한의 언어다.
시인은 ‘생각’을 거창한 철학의 개념으로 끌어올리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말의 순간, 오해가 생기는 바로 그 지점에 시를 놓아둔다. 이 시의 힘은 설명하지 않음에서 온다. 설득하려 들지 않고, 가르치려 하지 않으며, 그저 “탓하지 마라”라는 낮은 음성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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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에서 시인은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을 제시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말은 너무 흔해서 자주 잊히는 진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화의 순간에는 쉽게 잊는다.
내 생각이 기준이 되고, 내 말이 옳아지며, 다른 말은 ‘잘못’으로 분류된다.
시인은 바로 이 자동 반응을 멈춰 세운다. “잘못 말한다고 탓하지 마라”라는 문장은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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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잘못’이라는 단어는 중요하다. 시인은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곧바로 ‘잘못’과 연결시키는 우리의 습관을 드러낸다. 실제로 우리는 생각이 다를 때, 그것을 다름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오류로 판단한다. 이 짧은 네 줄은 논쟁과 갈등의 구조를 날카롭게 드러내면서도, 공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낮은 자세로 말을 건다.
그래서 이 시는 훈계가 아니라 성찰로 읽히는 시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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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연에서 시인은 시선을 안으로 돌린다. 나 혼자 생각한다면 단편적이니. 이 고백은 겸손하다. 많은 논쟁은 자기 확신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시는 확신 대신 한계를 말한다. 혼자만의 생각은 불완전하다는 인식, 이는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다.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부분적이며, 타인의 관점이 개입될 때 비로소 넓어진다.
시인은 이를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 “단편적”이라는 일상어 하나로 충분히 말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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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단편적’이라는 표현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전면적 오류도 아니고, 무가치하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조각일 뿐이다.
이 시는 자기 생각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할 뿐이다. 이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 드물다. 확신과 주장, 입장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 시는 스스로를 한 걸음 낮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시의 윤리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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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세 번째 연에서 시는 전환점을 맞는다. 서로를 생각하여 말한다면. 여기서 ‘생각하다’는 단어는 대상이 바뀐다. 앞에서는 ‘나 혼자 생각’했지만, 이제는 ‘서로를 생각’한다. 생각의 방향이 자기 안에서 관계로 이동한다. 이는 단순한 공감의 문제가 아니다. 말하기 이전에 상대를 상정하는 태도, 그 윤리적 준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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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말은 언제나 생각 이후에 온다. 즉흥적 언어가 아니라, 고려된 언어다. 서로를 생각한다는 것은 상대의 처지, 감정, 맥락을 함께 끌어안고 말하는 일이다.
시인은 이것이 가능할 때, 언어는 상처가 아니라 다리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연은 시 전체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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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의 결론은 단정이 아니라 소망에 가깝다. 오해가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시인은 확언하지 않는다. “없다”가 아니라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 조심스러운 어조는 시 전체의 윤리와 맞닿아 있다. 인간관계에서 오해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아는 사람의 희망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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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철학 시이면서 동시에 생활 시다. 사유의 깊이는 있지만, 추상으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의 언어를 통해 생각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이 시는 독자를 가르치지 않고, 함께 생각하게 만든다.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말투, 자신의 판단 습관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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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 보아도 이 시는 사유를 잘 담아낸다. 짧은 행, 잦은 행갈이는 생각이 멈추고 이어지는 리듬을 만든다.
한 줄 한 줄이 생각의 호흡처럼 느껴진다. 빠르게 읽히지 않고, 중간중간 멈추게 된다. 이는 사유 시로서 중요한 요소다. 생각은 속도가 아니다. 멈춤 속에서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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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시가 말하는 ‘생각’은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서로를 고려하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이 시는 지식인의 시가 아니라, 관계를 살아내는 사람의 시다.
말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 애써본 사람의 오해 앞에서 한 번쯤 멈춰본 사람의 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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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정말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판단하고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다. 그 여운의 힘이 응축된 시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