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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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록 시인
〈불러 봅니다〉
노을 진
산자락의 설경.
눈송이 하나, 둘
설경에 스치니
그 옛날
나의 손 꼭 잡아주시던
부모님의 정감
그리운데
하늘나라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것
같아
불러 봅니다
아버님,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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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저녁, 가장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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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처음 읽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말의 온도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마치 겨울 저녁, 해가 막 넘어간 뒤
손을 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의 체온 같다.
이 시는 부모를 잃은 슬픔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부모를 잃고 난 뒤의 자세를 보여준다.
어떻게 그리워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를
시가 먼저 알고 멈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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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은 풍경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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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진 산자락의 설경”은
눈에 보이는 풍경이기 이전에
이미 정리된 마음의 상태다.
노을은 하루가 끝났다는 신호이고,
설경은 모든 소리를 덮은 뒤의 세계다.
이 시는 시작부터
떠들 수 없는 시간 위에 서 있다.
눈송이 하나, 둘이 “스친다”는 표현도 그렇다.
쏟아진다거나, 내린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스친다.
부모에 대한 기억 역시
삶을 뒤흔드는 폭풍이 아니라
가끔씩 조용히 지나가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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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이라는 말이 감추고 있는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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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이라는 말은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불러낸다.
어떤 시절이었는지,
어떤 부모였는지,
어떤 손길이었는지
이 시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나의 손 꼭 잡아주시던”이라는
아주 평범한 장면 하나만 남긴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대개 이렇게 평범한 순간 속에 숨어 있다.
이 시가 과장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모를 위대하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손을 놓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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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이라는 단어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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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는
‘사랑’이 아니라 ‘정감’이다.
정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오래 함께 있었기에
특별하지 않아서,
그래서 더 깊은 감정이다.
부모를 향한 정감은
그들이 살아 있을 때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늘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 정감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마음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순간을
조용히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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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라는 거리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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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것 같아”
이 구절에는 확신이 없다.
기도도 아니고, 선언도 아니다.
‘같아’라는 말은
사람다운 말이다.
보고 싶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상태.
이 시는 부모를 신앙의 대상으로 올려놓지 않는다.
다만 멀어졌지만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은 존재로 둔다.
그 거리가 이 시를 차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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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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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제목은
가장 중요한 감정의 방향을 말해준다.
‘부릅니다’가 아니라
‘불러 봅니다’.
이 말속에는
대답이 없어도 괜찮다는 마음이 있다.
부르지 않으면 더 쓸쓸해질 것 같아서
그저 한 번 불러보는 행위이다.
부모를 향한 그리움이
이제는 요구가 아니라
확인에 가까워졌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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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호명, 울지 않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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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어머님”
이 마지막 구절에는
울음이 없다.
쉼표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 쉼표는 눈물이 아니라
숨이다.
이 시는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읽는 사람이
대신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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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독자에게 건네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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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는 동안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기 부모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는
그 기억을 강요하지 않는다.
말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기억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좋은 추모시는
자신의 슬픔을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의 슬픔이
스스로 걸어 들어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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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조용한 부름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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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 봅니다〉는
부모를 기리는 시이면서
부모를 떠나보낸 뒤
어른이 된 화자의 태도를 보여주는 시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소리 높여 외칠수록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용히 불러볼 때
비로소 오래 남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읽고 나면 침묵 속에 조용해진다.
눈 내린 어제의 저녁처럼 고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