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
철쭉꽃 연정
■
시인 편명선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갈까나
유혹하는 저 꽃들의
애원 어찌하고
멈춰 선 발길
더는 갈 수가 없으니
온 산하가 붉게만 타다가
그대 그리움도 태우고
나마저 태우면
어찌하나요?
어찌 갈까나
눈에 밟혀서 어찌 갈까나
한사코 붙잡는 저 철쭉꽃
애간장 녹이는
연정을…
발자국마다
다홍빛으로 타는 그리움
바람마저 가지 말라고 하고
서산의 해는 숨넘어갈
듯한데
몰라라 차라리 내가
철쭉이 되어 천년만년
그대를 기다리는 화신이나
되어 볼까요.
■
이 시는 자연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곧 연정의 감각으로 전이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철쭉은 단순한 봄꽃이 아니라, 떠나려는 자를 붙잡는 정념의 화신으로 기능한다. 시의 출발점은 “어디로 가나 / 어딜로 갈까나”라는 반복적 물음인데, 이는 길의 문제이기 이전에 마음의 방향을 상실한 상태를 드러낸다. 화자는 이미 이동의 주체가 아니라, 유혹받고 설득당하는 존재다.
■
첫 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유혹’과 ‘애원’이 동시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유혹은 능동적이고, 애원은 절박하다. 이 상반된 정조가 철쭉에 겹쳐지며, 꽃은 단순히 아름다운 대상이 아니라 사연을 지닌 존재로 변모한다. 이때 화자는 꽃을 본다기보다, 꽃에게 호명되고 있다. 자연이 인간을 부르는 순간, 시는 이미 서정의 깊은 국면으로 진입한다.
■
둘째 연에서 시적 긴장은 한층 고조된다. “멈춰 선 발길 / 더는 갈 수가 / 없으니”라는 단정은 물리적 정지이자 정신적 체포 상태다. 온 산하가 “붉게만 타다가”라는 표현은 시각적 묘사를 넘어 정념의 확산을 의미한다. 붉음은 열정이며 동시에 소멸의 색이다. 그 붉음 속에서 “그대 그리움도 / 태우고 / 나마저 / 태우면”이라는 구절은, 사랑이 대상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소진시키는 힘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화자는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질문으로 되돌린다. “어찌하나요?”라는 물음은 선택의 곤란이 아니라, 존재의 곤란에 가깝다.
■
셋째 연은 반복을 통해 감정의 덫을 강화한다. “어찌 갈까나”의 되풀이와 “눈에 밟혀서”라는 표현은, 시각적 잔상이 심리적 구속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철쭉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한사코 붙잡는 / 저 철쭉꽃”에서 꽃은 손을 뻗는 존재가 되고, “애간장 녹이는 / 연정”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랑의 고통과 달콤함이 동시에 응축된다. 이 연정은 설레는 사랑이 아니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숙명적 정이다.
■
넷째 연에서 시는 공간 전체를 정념의 무대로 확장한다. “발자국마다 / 다홍빛으로 / 타는 그리움”은 화자의 움직임 자체가 흔적이 되어 남는 장면이다. 이는 그리움이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시간 위에 각인되는 감정임을 말한다. 특히 “바람마저 / 가지 말라고 / 하고”라는 구절은 자연 전체가 화자의 결단에 개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의지는 미약해지고,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설득자로 변한다. “서산의 해는 / 숨넘어갈 / 듯한데”에서 시간은 급박해지고, 해 질 녘의 이미지가 이별 직전의 심리적 압박을 상징한다.
■
마지막 연은 시의 정서적 결단이다. “몰라라”라는 짧은 단어는 체념이자 항복이며, 동시에 자유의 선언이다. 떠나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을 거부하고, 화자는 존재의 변형을 선택한다. “차라리 내가 / 철쭉이 되어”라는 발상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로 동화되겠다는 의지다.
여기서 기다림은 수동적 인내가 아니다.
“천년만년 / 그대를 기다리는 / 화신”은 시간의 차원을 넘어선 헌신의 형상이다.
화자는 인간으로서의 이동을 포기하는 대신, 자연의 일부로 남아 사랑을 지속시키는 길을 택한다.
■
이 시의 미덕은 과장 없이도 강렬한 감정을 끌어낸다는 점이다.
언어는 담백하지만, 반복과 색채, 자연의 의인화를 통해 연정의 밀도를 높인다. 철쭉은 한국적 정서에서 흔히 보아온 꽃이지만, 이 시에서는 떠남을 붙드는 붉은 운명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결국 「철쭉꽃 연정」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사랑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길을 잃고, 기꺼이 머무를 수 있는가를 조용히 보여준다.
그 조용함 속에 이 시의 깊은 울림이 있는 대표적인 서정시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