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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편명선 시인-철쭉꽃 연정》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철쭉꽃 연정

시인 편명선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갈까나

유혹하는 저 꽃들의

애원 어찌하고


멈춰 선 발길

더는 갈 수가 없으니

온 산하가 붉게만 타다가

그대 그리움도 태우고

나마저 태우면

어찌하나요?


어찌 갈까나

눈에 밟혀서 어찌 갈까나

한사코 붙잡는 저 철쭉꽃

애간장 녹이는

연정을…


발자국마다

다홍빛으로 타는 그리움

바람마저 가지 말라고 하고

서산의 해는 숨넘어갈

듯한데


몰라라 차라리 내가

철쭉이 되어 천년만년

그대를 기다리는 화신이나

되어 볼까요.



이 시는 자연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곧 연정의 감각으로 전이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철쭉은 단순한 봄꽃이 아니라, 떠나려는 자를 붙잡는 정념의 화신으로 기능한다. 시의 출발점은 “어디로 가나 / 어딜로 갈까나”라는 반복적 물음인데, 이는 길의 문제이기 이전에 마음의 방향을 상실한 상태를 드러낸다. 화자는 이미 이동의 주체가 아니라, 유혹받고 설득당하는 존재다.


첫 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유혹’과 ‘애원’이 동시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유혹은 능동적이고, 애원은 절박하다. 이 상반된 정조가 철쭉에 겹쳐지며, 꽃은 단순히 아름다운 대상이 아니라 사연을 지닌 존재로 변모한다. 이때 화자는 꽃을 본다기보다, 꽃에게 호명되고 있다. 자연이 인간을 부르는 순간, 시는 이미 서정의 깊은 국면으로 진입한다.


둘째 연에서 시적 긴장은 한층 고조된다. “멈춰 선 발길 / 더는 갈 수가 / 없으니”라는 단정은 물리적 정지이자 정신적 체포 상태다. 온 산하가 “붉게만 타다가”라는 표현은 시각적 묘사를 넘어 정념의 확산을 의미한다. 붉음은 열정이며 동시에 소멸의 색이다. 그 붉음 속에서 “그대 그리움도 / 태우고 / 나마저 / 태우면”이라는 구절은, 사랑이 대상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소진시키는 힘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화자는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질문으로 되돌린다. “어찌하나요?”라는 물음은 선택의 곤란이 아니라, 존재의 곤란에 가깝다.


셋째 연은 반복을 통해 감정의 덫을 강화한다. “어찌 갈까나”의 되풀이와 “눈에 밟혀서”라는 표현은, 시각적 잔상이 심리적 구속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철쭉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한사코 붙잡는 / 저 철쭉꽃”에서 꽃은 손을 뻗는 존재가 되고, “애간장 녹이는 / 연정”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랑의 고통과 달콤함이 동시에 응축된다. 이 연정은 설레는 사랑이 아니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숙명적 정이다.


넷째 연에서 시는 공간 전체를 정념의 무대로 확장한다. “발자국마다 / 다홍빛으로 / 타는 그리움”은 화자의 움직임 자체가 흔적이 되어 남는 장면이다. 이는 그리움이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시간 위에 각인되는 감정임을 말한다. 특히 “바람마저 / 가지 말라고 / 하고”라는 구절은 자연 전체가 화자의 결단에 개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의지는 미약해지고,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설득자로 변한다. “서산의 해는 / 숨넘어갈 / 듯한데”에서 시간은 급박해지고, 해 질 녘의 이미지가 이별 직전의 심리적 압박을 상징한다.


마지막 연은 시의 정서적 결단이다. “몰라라”라는 짧은 단어는 체념이자 항복이며, 동시에 자유의 선언이다. 떠나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을 거부하고, 화자는 존재의 변형을 선택한다. “차라리 내가 / 철쭉이 되어”라는 발상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로 동화되겠다는 의지다.

여기서 기다림은 수동적 인내가 아니다.

“천년만년 / 그대를 기다리는 / 화신”은 시간의 차원을 넘어선 헌신의 형상이다.

화자는 인간으로서의 이동을 포기하는 대신, 자연의 일부로 남아 사랑을 지속시키는 길을 택한다.


이 시의 미덕은 과장 없이도 강렬한 감정을 끌어낸다는 점이다.

언어는 담백하지만, 반복과 색채, 자연의 의인화를 통해 연정의 밀도를 높인다. 철쭉은 한국적 정서에서 흔히 보아온 꽃이지만, 이 시에서는 떠남을 붙드는 붉은 운명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결국 「철쭉꽃 연정」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사랑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길을 잃고, 기꺼이 머무를 수 있는가를 조용히 보여준다.

그 조용함 속에 이 시의 깊은 울림이 있는 대표적인 서정시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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