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
오월의 탄생화
■
시인 박민정
오월 아흐레 햇살 눈부신 오후
횡성 반곡리 외할머니댁 건넌방
엄마는 산고의 진통으로 나를 낳고
그날 하얀 창호지 너머 뜰 한편에서
가지마다 조용히 향기 모으던 너
침묵으로 인내하며 순정의 꽃 피웠지
우리는 같은 시간 세상에 닿은
조그만 꽃망울
엄마 식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
널 꽃피운 여린 가지에도 맺혔을까
젖 부풀어 꽃 몸살 앓던 계절
서툰 생의 나의 첫울음 위로
너의 고운 향기가 고요히 내려앉았지
우리를 시샘하는 꽃샘바람은
너무 일찍 가지를 흔들었고
아버지 부재 속에 태어난 나는
어쩌면 너보다 먼저
꺾였을지도 몰라
세라피나 나의 어머니
이천구 년
잔인한 사월 스무 이레 날
주님 곁으로 떠나셨지
너의 향기는 내게 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흩날려
바람 속으로 사라졌지
첫울음 머금던 내 심장 언저리에서
해마다 그 향기 되살아 피어나
다시 소리 없이 지는 오월의 꽃
해마다 우리 집 뜰에서 만나는
어머니 숨결 닮은 너의 향기
너 라일락 꽃 나 수산나
나는 너의 노을이 되고
너는 나의 그림자가 되어
보랏빛 우정 도란도란 나눌 때
여지없이 꽃샘바람 가지를 흔들면
바닥에 꽃비 내리는 너의 향기
나를 위해 소복소복 쌓이겠지
■
태어남과 떠남이 같은 향기로 남는 시
■
이 시는 태어난 날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이 시가 말하려는 것은 탄생의 기쁨이 아니라, 태어남과 동시에 시작된 상실이라는 사실이다. 화자는 자신이 세상에 나온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장소도, 햇살도, 창호지 너머의 뜰도 선명하다. 그러나 그 선명함은 기쁨을 강조하기보다, 곧 다가올 부재를 더 깊게 예감하게 만든다.
■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은 사실을 감정으로 바꾸지 않고, 사실 그대로 두는 태도에 있다. 산고,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죽음 같은 말들은 어떤 과장도 없이 놓여 있다. 울음을 요구하지도 않고,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 대신 라일락이라는 존재를 조용히 곁에 세워 둔다. 꽃은 말하지 않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모든 사연을 품는다.
■
라일락은 이 시에서 단순한 탄생화가 아니다. 화자와 같은 시간에 피어난 또 하나의 생명이며, 동시에 화자보다 먼저 꺾인 운명의 표상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 세상에 닿은 / 조그만 꽃망울”이라는 구절에서 인간과 꽃의 경계는 사라진다. 꽃은 화자가 되고, 화자는 꽃이 된다. 이 겹침은 자연을 빌려 인간의 삶을 말하는 서정시의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
■
이 시의 정서는 격렬하지 않다. 오히려 낮은 온도로 유지된다. 그 절제가 시를 더욱 아프게 만든다. “어쩌면 너보다 먼저 꺾였을지도 몰라”라는 고백에는 자기 연민보다도, 삶을 일찍 감당해야 했던 한 존재의 담담한 인식이 담겨 있다. 슬픔을 크게 외치지 않기에, 독자는 더 깊이 그 슬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대목은 이 시의 중심이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어머니는 기억 속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존재가 된다. “주님 곁으로 떠나셨지”라는 말은 위로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남은 자의 고독을 숨기지 않는다. 신앙의 문장은 체념이 아니라, 사랑이 갈 곳을 마련해 주는 방식으로 쓰인다.
■
시간은 이 시에서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다시 매해 돌아오는 오월의 꽃으로 원을 그린다. 상실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해마다 되살아난다. 그러나 그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살아 있게 하는 애도의 방식이다. 향기는 사라지지만, 매년 다시 피어난다.
■
후반부에 이르러 화자와 라일락은 친구가 된다. 노을과 그림자, 보랏빛 우정이라는 표현 속에는 슬픔을 견디는 성숙한 태도가 담겨 있다. 상실은 여전히 아프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함께 피고 함께 지는 존재가 곁에 있다.
■
〈오월의 탄생화〉는 개인의 생애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누구나 지나온 자리로 독자를 데려간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부재 속에서 태어나고, 어떤 향기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이 시는 그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읽고 나면 오래 말이 남지 않는다. 대신, 말로 다 하지 못한 향기 하나가 남아있는데 이 시의 향기는 태어남도
떠남도 같은 향기로 남는 시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