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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박민정-오월의 탄생화》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오월의 탄생화


시인 박민정


오월 아흐레 햇살 눈부신 오후

횡성 반곡리 외할머니댁 건넌방

엄마는 산고의 진통으로 나를 낳고

그날 하얀 창호지 너머 뜰 한편에서

가지마다 조용히 향기 모으던 너


침묵으로 인내하며 순정의 꽃 피웠지

우리는 같은 시간 세상에 닿은

조그만 꽃망울


엄마 식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

널 꽃피운 여린 가지에도 맺혔을까


젖 부풀어 꽃 몸살 앓던 계절

서툰 생의 나의 첫울음 위로

너의 고운 향기가 고요히 내려앉았지


우리를 시샘하는 꽃샘바람은

너무 일찍 가지를 흔들었고


아버지 부재 속에 태어난 나는

어쩌면 너보다 먼저

꺾였을지도 몰라


세라피나 나의 어머니

이천구 년

잔인한 사월 스무 이레 날

주님 곁으로 떠나셨지


너의 향기는 내게 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흩날려

바람 속으로 사라졌지


첫울음 머금던 내 심장 언저리에서

해마다 그 향기 되살아 피어나

다시 소리 없이 지는 오월의 꽃


해마다 우리 집 뜰에서 만나는

어머니 숨결 닮은 너의 향기


너 라일락 꽃 나 수산나

나는 너의 노을이 되고

너는 나의 그림자가 되어


보랏빛 우정 도란도란 나눌 때

여지없이 꽃샘바람 가지를 흔들면

바닥에 꽃비 내리는 너의 향기

나를 위해 소복소복 쌓이겠지



태어남과 떠남이 같은 향기로 남는 시


이 시는 태어난 날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이 시가 말하려는 것은 탄생의 기쁨이 아니라, 태어남과 동시에 시작된 상실이라는 사실이다. 화자는 자신이 세상에 나온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장소도, 햇살도, 창호지 너머의 뜰도 선명하다. 그러나 그 선명함은 기쁨을 강조하기보다, 곧 다가올 부재를 더 깊게 예감하게 만든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은 사실을 감정으로 바꾸지 않고, 사실 그대로 두는 태도에 있다. 산고,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죽음 같은 말들은 어떤 과장도 없이 놓여 있다. 울음을 요구하지도 않고,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 대신 라일락이라는 존재를 조용히 곁에 세워 둔다. 꽃은 말하지 않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모든 사연을 품는다.


라일락은 이 시에서 단순한 탄생화가 아니다. 화자와 같은 시간에 피어난 또 하나의 생명이며, 동시에 화자보다 먼저 꺾인 운명의 표상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 세상에 닿은 / 조그만 꽃망울”이라는 구절에서 인간과 꽃의 경계는 사라진다. 꽃은 화자가 되고, 화자는 꽃이 된다. 이 겹침은 자연을 빌려 인간의 삶을 말하는 서정시의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


이 시의 정서는 격렬하지 않다. 오히려 낮은 온도로 유지된다. 그 절제가 시를 더욱 아프게 만든다. “어쩌면 너보다 먼저 꺾였을지도 몰라”라는 고백에는 자기 연민보다도, 삶을 일찍 감당해야 했던 한 존재의 담담한 인식이 담겨 있다. 슬픔을 크게 외치지 않기에, 독자는 더 깊이 그 슬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대목은 이 시의 중심이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어머니는 기억 속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존재가 된다. “주님 곁으로 떠나셨지”라는 말은 위로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남은 자의 고독을 숨기지 않는다. 신앙의 문장은 체념이 아니라, 사랑이 갈 곳을 마련해 주는 방식으로 쓰인다.


시간은 이 시에서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다시 매해 돌아오는 오월의 꽃으로 원을 그린다. 상실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해마다 되살아난다. 그러나 그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살아 있게 하는 애도의 방식이다. 향기는 사라지지만, 매년 다시 피어난다.


후반부에 이르러 화자와 라일락은 친구가 된다. 노을과 그림자, 보랏빛 우정이라는 표현 속에는 슬픔을 견디는 성숙한 태도가 담겨 있다. 상실은 여전히 아프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함께 피고 함께 지는 존재가 곁에 있다.


〈오월의 탄생화〉는 개인의 생애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누구나 지나온 자리로 독자를 데려간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부재 속에서 태어나고, 어떤 향기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이 시는 그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읽고 나면 오래 말이 남지 않는다. 대신, 말로 다 하지 못한 향기 하나가 남아있는데 이 시의 향기는 태어남도

떠남도 같은 향기로 남는 시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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