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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윤서 <수옥>- 다행이다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다행이다

윤 서(수옥)


다행이다

아직 봄이

종지그릇에 한 모금 남아 있어

목은 축일 수 있다

맨살로 버틴 배롱나무 곁

벚나무는 벌써 조막손을 내밀어 흔든다

언제나처럼

거기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뒤 거기 숨어

박새소리만


벌어진 틈 사이

비집고 들어오는

없애려고 해도 쪼개질 뿐

등에 잘도 업혀 있구나


이젠 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려 하늘과 나를 이어주는

이어주는 거기 벌어진 틈 사이

침묵으로 지켜내고 있다.



한 모금의 봄, 한 줄기의 윤리


이 시의 첫마디는 감탄이 아니라 숨 고르기에 가깝다. “다행이다”는 기쁜 소식의 외침이라기보다, 겨우 남은 것을 확인했을 때 나오는 낮은 목소리다. 시는 그 낮은 목소리를 끝까지 유지한다. 그래서 읽는 이는 ‘다행’의 이유를 크게 축하하기보다, 사라져 가는 것들 사이에서 남아 있는 최소량의 생을 조심스럽게 만져 보게 된다.


“아직 봄이 / 종지그릇에 한 모금 남아 있어”라는 발상은 봄을 거대한 계절로 두지 않는다. 봄은 종지그릇, 밥상 끝에 놓이는 작은 그릇에 담긴다. 계절이 세계를 덮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그릇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물기처럼 취급된다. 이 축소는 단지 소박함이 아니라, 시대적 감각이다. 풍성한 봄이 아니라 남아 있는 봄, 더 정확히는 남겨진 봄이다. 그러니 “목은 축일 수 있다”는 말도 환희가 아니다. 살 수 있다가 아니라, 마를 것 같은 목을 잠시 적실 수 있다는 정도다. 시는 큰 희망 대신, 삶이 끝내 꺼지지 않도록 하는 미세한 수분을 붙든다.


여기서 ‘목’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발화의 기관이다.

말이 마르기 전에, 혹은 마음이 말라붙기 전에, 한 모금의 봄으로 언어의 목을 축이는 일이다.

시가 스스로를 성립시키는 조건이 된다.

이 시는 처음부터 “말”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예고하였다. 초반엔 목을 축이지만, 후반엔 “이젠 말이 닿지 않는 곳”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이 시는 말이 닿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출발해, 말이 닿지 않는 지점까지 걸어가는 시다.



맨살과 조막손은 -생의 취약함이 만드는 장면


“맨살로 버틴 배롱나무 곁”은 놀랍도록 구체적이다. 배롱나무의 매끈한 수피는 ‘맨살’로 비유되며, 겨울을 벗고 버틴 몸처럼 느껴진다. 이때 “버틴”은 자연의 견딤이자 인간의 견딤이다. 시는 자연을 관찰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기 존재의 상태를 자연에 걸어 둔다. ‘맨살’은 보호막이 벗겨진 자리다. 즉, 이 시의 세계는 이미 방어가 약해진 세계이며, 그 취약함이 시의 윤곽을 만든다.


이어지는 “벚나무는 벌써 조막손을 내밀어 흔든다”에서 시는 한 번 더 인간의 신체로 이동한다. 벚꽃의 가지가 ‘손’이 되고, 그 손은 ‘조막손’이다. 조막손은 크지 않고, 완전하지 않으며, 어린 손처럼 보인다. 벚나무가 내미는 손은 봄의 환대이지만 동시에 미완의 인사다. 마치 “아직 다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먼저 손을 흔들어 본다”는 식이다. 봄은 성큼 온 것이 아니라, 조심스레 손을 내미는 정도로만 왔다.


이 대목이 주는 정서는 달콤한 설렘과 다르다. “벌써”라는 부사는 성급한 기대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시의 분위기 속에서는 오히려 불안한 조기 신호에 가깝다. 계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느낌, 너무 빨리 흔들리는 손, 그 손짓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에 섞인 걱정이 은근히 배어 있다. “다행이다”가 환희가 아니라 안도인 까닭이 여기서 더 선명해진다.


“거기”라는 말의 반복: 세계의 좌표를 잃지 않으려는 몸짓


“언제나처럼 / 거기 우듬지 잔가지 / 잎사귀 뒤 거기 숨어 / 박새소리만”


이 구절에서 눈에 띄는 것은 “거기”의 반복이다. ‘거기’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시에서 ‘거기’는 단순한 위치가 아니라 확인하려는 자리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사람은 자주 “거기 있지?” 하고 묻는다. 시는 자연에게 묻고, 동시에 자신에게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박새소리만”이다.


여기서 “만”은 결핍의 단어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박새소리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 ‘하나뿐’은 단순히 허무가 아니다. 박새소리는 계절의 미세한 증거이며, 살아 있음의 잔향이다. 시는 잎사귀 뒤에 숨어 있는 소리를 듣는다. 눈에 보이는 봄보다, 귀에 들리는 봄이 더 믿을 만한 듯이. 즉, 이 시의 감각은 화려한 개화보다 숨은 소리를 통해 계절을 확인한다. 그만큼 세계는 쉽게 믿기 어렵고, 그래서 시는 작고 은밀한 증거들을 붙들며 세계를 재확인한다.


‘우듬지-잔가지-잎사귀 뒤’는 상하 구조를 이루었다.

시선이 위로 올라가다 다시 뒤로 물러서는 동작을 만든다. 올라가되 드러내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되 듣는 것이다.

이 시가 침묵을 향해 가는 동선이 이미 초반부터 준비되어 있는 셈이다.


시인의 시의 틈새- 들어오는 것, 업히는 것, 쪼개지는 것


중간 연에서 시는 갑자기 서늘해진다.


“벌어진 틈 사이

비집고 들어오는

없애려고 해도 쪼개질 뿐

등에 잘도 업혀 있구나”


여기서 ‘틈’은 이 시의 핵심 상징이다. 틈은 자연의 틈일 수도, 마음의 틈일 수도, 관계의 틈일 수도, 시대의 균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틈이 벌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생긴 금이 아니라, 계속 벌어지는 금이다. 그 틈 사이로 무엇인가가 “비집고 들어온다.” 비집고 들어온다는 표현은 침입의 뉘앙스를 갖는다. 조용히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몸을 밀어 넣어 들어온다. 시가 초반에 ‘한 모금’을 말하며 섬세함을 보여줬다면, 여기서는 마찰과 통증이 느껴지는 동사를 쓴다.


“없애려고 해도 쪼개질 뿐”이라는 통찰은 더 깊다. 균열을 없애려는 시도가 오히려 균열을 세분화한다. 큰 상처를 도려내려 할수록 작은 상처가 늘어난다. 이건 개인의 상처 치유에도, 사회의 갈등 해결에도, 어떤 관계의 회복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비극적 역설이다. ‘없애기’의 의지가 곧바로 ‘회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는 ‘치유’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쓰지 않고, “쪼개질 뿐”이라는 거친 결과를 내놓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줄, “등에 잘도 업혀 있구나.”

여기서 ‘그것’은 화자의 등이 지고 가는 짐이 된다. 틈에서 들어온 것으로 불안과 죄책, 상실의 시대의 상처, 혹은 말해지지 못한 어떤 사건은 이미 등에 업혀 떨어지지 않는다. ‘업히다’는 동사는 기묘하다. 보통 사랑이나 돌봄의 장면에서 쓰이지만, 여기서는 원치 않는 것이 등에 업혀 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는 분리할 수 없는 상태, 어쩌면 한 몸이 된 상태다. 시는 이 결합을 원망으로 터뜨리지 않는다. “잘도”라는 말에는 체념과 아이러니가 섞인다. 마치 “너는 참 능숙하게도 내 삶에 들러붙는구나” 하는 씁쓸한 웃음이 있다. 이 지점에서 시는 ‘해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쓴웃음의 온도를 가진다. 그게 이 작품을 단단하게 만든다. 비탄만으로는 세계를 견디기 어렵고, 가벼운 낙관만으로는 진실을 건너기 어렵다. 이 시는 그 사이의 온도로 버틴다.


언어의 한계가 곧 시의 자리


“이젠 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 한 줄은 시의 전환점이다. 초반엔 ‘목을 축일 수 있다’고 했다. 말할 수 있는 최소의 수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말이 닿지 않는 곳이 생긴다. 이 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곳으로 “간다.” 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말이 실패하는 지점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이다. 그 실패의 자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시의 종착으로 삼는다.


“하늘과 나를 이어주는”이라는 구절은 그곳이 단절의 자리인 동시에 연결의 자리임을 보여준다. 하늘과 나를 이어주는 것은 다리이기도 하고, 실이기도 하고, 틈이기도 하다. 이 역설이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틈을 ‘끊어진 자리’로만 생각하지만, 시는 틈을 통로로 다시 정의한다. 벌어진 틈은 아픈 자리지만, 동시에 빛이 들어오는 자리이다. 이어지는 거기 벌어진 곳의

사람과 하늘의 유한과 무한을 이어주는 것은 완벽한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완벽하지 않음에서 생기는 좁은 통로일 수 있다.


“거기 벌어진 틈 사이”가 다시 반복되는 순간, 시는 마치 기도처럼 자기 문장을 되뇐다. 이 반복은 장식이 아니라, 붙잡기이라 할 수 있다. 손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의미를 다시 움켜쥐기 위해, 같은 말을 다시 쓴다. 그래서 마지막이 “침묵으로 지켜내고 있다”로 시인은 매듭짓는다.

시에 첫머리에 목을 축이는 종지그릇에 한 모금은 철학적 사유의 관점이다.

시의 종결 침묵으로 지켜내는 시인은

삶의 지평을 이끌어가는 지혜가 담겨있는

삶의 교시의 시라 평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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