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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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열고(둠벙)
아름다운 것을
보면 웃고
슬픈 것을 보면
참지 말고 큰소리로
엉엉 울어라
메마른 땅에 풀이
자랄 수 없으니
날짐승들이
쉬어 갈 곳이 없다
굳게 닫힌 가슴에
무엇을 담길까
바늘 한 개 꽂을 수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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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다짐이 아닌 권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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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자신을 단련하라는 다짐문이 아니다. 더 강해지라는 선언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동안 너무 단단해진 우리에게 건네는 조용한 권유이다. 웃어도 되고, 울어도 된다는 말. 이 단순한 문장은 오늘날 가장 듣기 어려운 말이 되었다. 시는 그 잃어버린 허락을 다시 꺼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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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선택이 아니라 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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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우면 웃고, 슬프면 운다는 것은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반사 작용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감정을 선택해야 할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을까. 이 시는 감정을 통제하라는 세상의 요구에 맞서, 감정은 애초에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것임을 되돌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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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이라는 소리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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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이라는 말에는 설명이 없다. 이 단어는 논리를 거치지 않고 곧장 몸으로 간다. 체면도, 정리도, 문장도 없다. 이 시가 굳이 ‘조용히’가 아니라 ‘엉엉’을 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울음이 작아질수록 마음은 더 고립되기 때문이다. 크게 우는 일은 약함이 아니다.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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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땅은 감정이 닫힌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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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중심에 놓인 자연의 장면은 풍경이 아니라 상태이다.
풀이 자라지 않는 땅, 날짐승이 쉬지 못하는 공간, 이것은 감정이 스며들지 못하는 마음의 모습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마음이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이 멈춘 자리이다. 시는 그 정적의 위험을 조용히 침묵 속에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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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 갈 곳’이라는 표현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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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중요한 말은 ‘머무는 곳’이 아니다. ‘쉬어 갈 곳’이다. 감정은 오래 붙잡아 둘수록 썩는다. 잠시 머물다 가야 한다. 울음도 웃음도 그렇다. 이 시는 감정을 억누르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감정에 갇히지 말라고 함께 말한다. 그 균형이 이 시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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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가슴은 상처가 아니다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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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힌 가슴은 상처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반복된 방어가 만든 태도이다.
더는 느끼지 않겠다는 결심, 더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각오이다.
그러나 그 태도는 결국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다. 이 시는 상처를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상처 이후의 선택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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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한 개조차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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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은 가장 작은 침투의 상징이다.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 가슴이라면, 그 안은 이미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굳어버린 상태가 된다.
이 문장은 감정의 부재보다 더 깊은 절망을 보여준다.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없게 된 마음. 시는 그 상태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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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벙이라는 괄호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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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벙은 물을 모으는 곳이지만,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제목의 괄호는 설명이 아니라 경고다. 가슴을 둠벙처럼 닫아 두지 말라는 말, 감정은 가두는 것이 아니라 드나들게 해야 산다. 이 시는 가슴을 열라는 말을 감상적으로 쓰지는 않는다. 그것은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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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은 채우는 곳이 아니라 통과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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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마지막 질문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은 무엇을 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가슴은 지나가는 자리다. 웃음이 지나가고, 울음이 지나가고, 누군가의 슬픔이 잠시 앉았다 떠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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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이 꽂히지 않는 가슴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막혀 있는 것이다. 반대로 울 수 있는 가슴은 아직 길이 열려 있는 가슴이다. 이 시가 남기는 여운은 단순하다. 더 많이 가지라는 말도, 더 단단해지라는 말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흘려보낼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 다양한 격정 속에서도 아직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이라는 감정을 앞세우지도 내세우지도 않았지만 삶을
단단히 할 수 있는 감정이 닫히지 않아서
소리 내어 울 때에 마음의 깊은 골도 흘러
씻어 내리는 치유의 시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