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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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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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승대
오늘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했다
몸이 먼저
편지를 쓴다
계획은
책상에 남기고
나는 이불 안으로
몸을 접었다
숨 쉬는 일
밥 한 숟갈
잠에 드는 일이
이렇게
삶의 안쪽이라는 걸
아파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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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아픔은 사건이 아니라 도착이다. 삶의 바깥에서 계획을 세우고 의지를 호출하던 화자는, 어느 날 문득 삶의 안쪽으로 밀려 들어온다. 그 밀려듦의 이름이 ‘아픔’이다. 아픔은 초대받지 않았다. 그래서 제목은 ‘불청객’이다. 그러나 이 불청객은 파괴자가 아니라 길잡이다. 시는 그 사실을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단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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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에서 화자는 실패를 말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했다”는 고백은 무능의 선언이 아니라 질서의 전환이다. ‘하고 싶은 일’이 삶의 중심이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다. 그다음 연에서 “몸이 먼저 / 편지를 쓴다”라고 말할 때에 주체의 자리는 이미 이동한다.
말하던 ‘나’는 물러서고, 몸이 전면에 선다. 이 시에서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몸은 삶의 비상 연락망이며, 의식보다 먼저 반응하는 내면의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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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 책상에 남기고”라는 구절은 현대인의 초상이다. 계획은 책상 위에서 빛나지만, 삶은 침대 안으로 접혀 들어간다. ‘몸을 접었다’는 표현은 패배가 아니라 보호에 가깝다. 상처 난 동물이 몸을 말아 체온을 지키듯, 화자는 삶을 살기 위해 잠시 삶을 접는다. 이 접힘은 도피가 아니라 유지다. 삶을 계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동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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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중심부에 이르면 목록이 등장한다.
“숨 쉬는 일 / 밥 한 숟갈 / 잠에 드는 일.” 이 세 가지는 평소엔 삶의 배경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픔이 오면 배경이 전면이 된다.
이 시는 위대한 깨달음을 외치지 않는다. 대신 사소함의 위대함을 회복한다. 숨 쉬는 일과 밥 한 숟갈, 드는 것, 잠드는 것들이야말로 삶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화자는 아파서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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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파서야’라는 시간 부사에 해당한다. 깨달음은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통과의 결과다.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견뎌서 알게 된다. 이 시의 사유는 철학적 체계가 아니라 체험의 침전이다. 삶의 안쪽은 추상적인 내면이 아니다. 그것은 숨이 붙어 있고, 밥이 넘어가며, 잠이 찾아오는 자리다. 삶의 중심은 언제나 몸이 지키고 있었다는 고백이, 이 시의 가장 깊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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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또한 내용에 충실하다. 짧은 행, 단정한 호흡, 군더더기 없는 문장. 과장도 수사도 없다. 이 절제는 아픔의 미학이다. 아픈 사람은 장황해지지 않는다. 말은 줄어들고, 의미는 깊어진다. 시는 그 상태를 정확히 재현한다. 그래서 이 시는 ‘잘 쓴 시’라기보다 정직한 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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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은 결국 삶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정리한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가려낸다.
계획은 남고, 몸은 안으로 접히며, 호흡과 밥과 잠이 남는다. 그렇게 삶은 가장 작은 단위로 환원된다. 그러나 그 환원은 빈곤이 아니라 정수다. 삶이 가장 삶다워지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아픔 속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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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고 나면 독자는 묻게 된다. 나는 아직 삶의 바깥에 서 있는가, 아니면 삶의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가. 그리고 안쪽에 들어왔을 때, 나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이 시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한 가지 확신을 남긴다. 삶의 가장 깊은 자리는 언제나 조용하고, 작고, 몸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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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시는 위로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위로가 된다. 견뎌온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온도인 것이다.
삶의 안쪽을 가만히 데워주었다.
불청객처럼 찾아온 아픔이, 어느새 삶을 다시 살게 하는 안내자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