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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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이어령 선생님의 모든 철학을 쉽게 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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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언어,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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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등불, 인간이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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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의 이름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언제나 ‘생각하는 인간’의 상징이었다.
그는 기자였고, 소설가였으며, 문화평론가였고, 나중에는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 위에 놓여야 할 말은 하나였다.
“그는 물었다.”
그의 철학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의 연속이었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언어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죽음은 존재의 종말인가, 아니면 또 다른 말의 시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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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들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는 생각하기 위해 살지 않았고,
살기 위해 생각했다.
그의 글 속엔 언제나 ‘살아 있는 지성의 체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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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론은 그가 남긴 마지막 사유,
즉 인간과 언어, 생명과 빛,
그리고 죽음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이어령의 철학을 인문학적으로 다시 풀어낸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이자, 하나의 시이며,
한국인이 남긴 ‘존재의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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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이전의 언어는 ‘말씀의 철학’과 침묵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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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의 핵심은 ‘언어’다.
그는 언어를 인간의 고유한 증거로 보았으나,
동시에 언어가 인간을 속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언어는 인간을 묶기도 하고, 해방하기도 한다.”
그가 말한 ‘언어 이전의 언어’는 바로 그 해방의 지점이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울음으로 세상과 대화한다.
그 울음은 문법도, 문장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첫 언어다.
그는 이 언어를 ‘하늘의 언어’라 불렀다.
즉 인간의 말 이전에 이미 세계와 통하는 소리,
그것이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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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은 문학과 종교, 과학과 철학을 가로질러
이 언어의 근원을 찾았다.
그에게 말은 도구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증언하는 빛의 통로”였다.
이로써 언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생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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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철학 신앙을 넘어 존재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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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후기 사유는 ‘빛’으로 집약된다.
그가 말한 ‘빛’은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신을 보지 못하지만, 빛을 본다.
그리고 그 빛 안에서 인간의 그림자를 본다.”
이 한 문장은 그의 인생철학을 모두 품고 있다.
그에게 신은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보게 하는 관계’였다.
즉 신은 인간 바깥에 있는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 안에 흐르는 관계의 빛이다.
그는 서양의 합리주의가 신을 관념화했을 때,
‘빛의 관계론’으로 인간의 영혼을 되살렸다.
빛은 단순한 물리현상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알아보는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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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의 신학은 교리의 신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신학’, ‘눈물의 신학’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눈물 속에 숨어 있었고,
그 눈물이 바로 빛의 첫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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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학으로서의 죽음 ― “죽음 이후에도 말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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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평생 ‘죽음’을 사유했다.
젊은 시절에는 그것을 철학의 문장으로,
노년에는 그것을 기도의 언어로 써 내려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언어를 가질 수 있는가?”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있다. 그것은 침묵의 언어다.”
삶이 소리라면, 죽음은 여운이다.
그 여운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다시 신과 대화한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언어가 침묵으로 옮겨가는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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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유는 불교의 윤회와도 닮고,
기독교의 부활과도 닮았다.
그는 종교의 차이를 넘어,
모든 생명을 하나의 ‘빛의 순환’으로 보았다.
죽음은 그 순환의 완성이다.
이로써 그의 철학은 ‘존재의 신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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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사유의 근원, 한(恨), 기다림, 그리고 생명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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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인의 정서를 철학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지성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 ‘한’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시간’이었다.
“한은 절망이 아니라,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 한 문장은 한국인의 영혼을 완벽히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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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한’은 억눌림이 아니라
빛을 기다리는 인내의 언어였다.
한이 있기에 인간은 다시 일어선다.
그는 이를 ‘회복의 철학’이라 불렀다.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
이것이 한국적 인문학의 출발점이다.
그는 ‘한’을 통해
서양의 죄의식 철학을 넘어섰다.
죄의식은 인간을 무겁게 하지만,
한은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 기다림의 철학이
오늘날 세계 인문학에 던지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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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사랑 인간학의 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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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산업화와 정보화 시대를 누구보다 먼저 읽어낸 지식인이었다.
컴퓨터와 인터넷, 기계 정보의 도래를
단순히 기술의 진보로 보지 않았다.
그는 “기계가 생각하는 시대에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의 답은 명료했다.
“사랑이다.”
지성이 인간을 구분 짓는 시대는 끝났고,
사랑이 인간을 증명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 했다.
그의 인문학은 그래서 냉철하지 않다.
그것은 따뜻하고, 감정적이며, 눈물의 온도가 있다.
그는 인문학을 ‘머리의 학문’이 아니라
‘가슴의 언어’로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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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종말에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그의 말은,
오늘날 정보 시대를 향한 경고이자 예언이다.
기계는 정보를 모으지만,
사람만이 용서하고, 기다리고, 사랑한다.
그것이 이어령이 본 인간의 마지막 존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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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서 피어난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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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철학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없다.
그것은 시이자 철학이며, 기도이자 기록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어 하나는 있다.
“빛.” 그에게 빛은 신의 이름이자, 인간의 본성이다.
그 빛은 언어로 태어나고,
언어는 사랑으로 자라며,
사랑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그가 남긴 인문학은 이렇게 순환한다.
빛-언어-사랑-침묵-빛으로의
순환이 곧 생명의 리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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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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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은 사라져도 사랑은 남는다.
문명은 낡아도 언어는 다시 태어난다.
인간이 끝나도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이어령 선생님이 남긴 인문학의 결론이며,
그를 읽는 우리가 품어야 할 인간학의 불씨이다.
그의 철학은 한 시대의 종언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의 시작을 예고하는 영혼의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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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론은 이어령이 남긴 사유의 전 생애적 여정을
‘언어, 빛, 사랑, 죽음, 한, 인간학’의 순환구조로 재해석하였다.
그의 철학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구원학,
학문이 아니라 사랑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사유가 아니라 빛의 증언이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묻는다.
“우리는 여전히 빛을 사랑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