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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변희자 시인-잠시, 나를 놓다》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잠시, 나를 놓다

시인, 소설 평론가 변희자


쓸모없는 글을 쓰고

이해 못 할 누군가를 만나고

하릴없이 단톡을 기웃거렸다


모두 나를 찾는 몸짓이었을까

그래서일까

지금은 잠시 멈춘다


조용히 눈을 감고

내 안에 남은

잔물결 하나하나를

가만히 톡 친다


이 고요 속에서

나를 다시 만나니

그 발가벗은 투명함이

수정 같다


사유의 선물, 고요의 결


이 시는 시작부터 스스로를 낮춘다. “쓸모없는 글”이라는 말은 실패의 고백이 아니라, 목적에서 벗어난 상태에 대한 정직한 명명이다. 효율과 성과가 모든 가치를 대신하는 시대에, 이 한 문장은 이미 저항처럼 읽힌다. 시는 잘 쓰는 법보다, 멈추는 법을 먼저 보여준다.



이해 못 할 사람, 하릴없는 단톡이라는 장면들은 너무 익숙해서 지나치기 쉬운 풍경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익숙함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무의미해 보이는 만남과 접속들이 사실은 ‘나를 찾기 위한 몸짓’ 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다. 여기엔 자책도 변명도 없다. 그저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태도만 있다.



“모두 나를 찾는 몸짓이었을까”라는 문장은 이 시의 심장이다. 단정하지 않고 물음표로 남겨둔 이 문장은, 시를 독백에서 사유로 확장시킨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 시는 고백을 넘어 철학의 자리에 선다.



“지금은 잠시 멈춘다”라는 선언은 이 시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이 결심은, 사실 가장 어려운 선택이다. 이 멈춤은 도피가 아니라 용기다. 시는 움직임을 멈춤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마주할 자리를 만든다.



눈을 감고 잔물결을 ‘톡 친다’는 표현은 놀라울 만큼 섬세하다. 사유는 여기서 거창한 사색이 아니라, 감각의 미세한 접촉이다. 세게 흔들지 않고, 억지로 파헤치지 않는다. 생각은 이렇게 다뤄질 때 가장 깊어진다는 사실을 시는 몸으로 보여준다.



이 시의 고요는 공허가 아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고요다. 잔물결 하나하나를 느끼는 순간, 내면은 가장 예민한 상태가 된다. 고요는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불필요한 소음을 걷어낸 상태임을 이 시는 정확히 알고 있다.



“나를 다시 만나니”라는 구절에서, 시는 외부 세계를 완전히 내려놓는다. 이 만남은 새로움보다 회복에 가깝다. 잃어버렸던 자신을 다시 불러오는 장면이며, 그 만남이 조용하고 담담하다는 점에서 더욱 진실하다.



‘발가벗은 투명함’이라는 표현은 이 시의 미학적 결정체이다. 꾸밈을 벗긴 자아는 초라하지 않고, 오히려 단단하다.

수정 같다는 비유는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불순물이 제거된 맑음과 견고함 때문이다.

이 시에서 보석은 장식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상태이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어떤 결론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선물을 건넨다.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허락,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를 만날 수 있다”는 조용한 위안이다. 그래서 이 시는 읽는 이를 설득하지 않고, 동행하게 한다.

〈잠시, 나를 놓다〉는

사유를 과시하지 않고,

고요를 미화하지 않으며,

자아를 확대하지 않는다.

그 대신

멈춤이라는 가장 작은 선택으로

가장 단단한 자신에게 건네는

선물 같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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