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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산수유 정종록-나이》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나이


산수유 정종록


나이 들수록 무너지는 육신에

슬픔은 깊어지니

보이지 않은 눈물이 흐른다


어릴 때는

나이 들어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지만


흐르는 세월 따라

온몸의 통증은

나날이 이어지니


지는 해를

잡을 수

없는가 본다.


그러나

누구나 겪는 희로애락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어


오늘을 사랑하고

내일을 사랑하련다



나이는 시간의 양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다



이 시에서 ‘나이’는 단순한 경과 시간이 아니다. 살아온 햇수의 합계도 아니다. 나이는 인간이 세계와 맺어온 관계의 두께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을 어떻게 통과해왔는가에 대한 총체적 흔적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이를 말하면서 곧장 육신을 불러낸다. 육신은 시간을 가장 먼저, 가장 정직하게 기억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머리로 계산되기 전에 몸에서 감각으로 도착한다. 이 시의 출발은 바로 그 감각의 진실성에 있다.



무너지는 육신, 인간 조건에 대한 정면 응시



‘무너지는 육신’이라는 표현에는 회피가 없다. 인간은 늙고, 쇠하고, 결국 사라진다는 사실을 시인은 애써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이는 실존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깝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이며, 바로 그 유한성이 삶을 사유하게 만든다. 시인은 무너짐을 비극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임을 조용히 인정한다. 이 인정은 체념이 아니라 성찰이다.


슬픔의 심화와 눈물의 의미


나이가 들수록 슬픔이 깊어진다는 진술은, 슬픔의 양이 늘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슬픔이 점점 더 말로 표현되기 어려운 층위로 내려간다는 뜻에 가깝다. ‘보이지 않은 눈물’은 감정의 소멸이 아니라 감정의 내면화다. 젊은 시절의 슬픔이 외부로 터져 나오는 파열이라면, 이 시의 슬픔은 안으로 스며드는 침전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는 감정이 존재의 표면에서 심층으로 이동한 결과다.


자랑이던 시간의 무게, 전환의 순간



어릴 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늘어나는 일이었다. 미래는 확장되어 있었고, 시간은 언제나 앞에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인식이 전환되는 지점을 정확히 포착한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은 더 이상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지나온 것’이 된다. 이 전환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시간에 대해 자랑하던 태도는 사라지고, 시간 앞에서 자신을 가늠하는 태도가 남는다. 이 장면에서 시는 성장의 신화를 내려놓고 성찰의

단계로 들어선다.


통증이라는 몸의 철학


시 속의 통증은 단순한 신체적 불편이 아니다. 통증은 몸이 보내는 철학적 신호다. 인간은 통증을 통해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동시에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통증은 삶이 남긴 흔적이며, 살아온 시간의 물리적 증거다. 이 시는 통증을 제거해야 할 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통증을 통해 삶의 무게와 진실성을 드러낸다. 고통을 사유로 끌어올리는 이 태도는 매우 성숙하다.


지는 해를 붙잡지 않는 지혜


‘지는 해를 잡을 수 없는가 본다’라는 구절에는 중요한 철학적 통찰이 담겨 있다. 해가 진다는 사실을 붙잡으려 할수록 인간은 시간과 싸우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싸움을 선택하지 않는다. 해가 지는 것을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인다. 이는 시간에 대한 패배가 아니라 시간과의 화해다. 유한성을 인정하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불필요한 조급함에서 벗어난다.



희로애락을 자연의 섭리로



이 시의 중심 윤리는 희로애락을 개인의 비극이나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지 않는 데 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즐거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 경험이다. 이를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철학적으로 이는 세계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존재 조건을 긍정하는 자세다. 이 태도 덕분에 시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오늘을 사랑한다는 결단



‘오늘을 사랑한다’는 말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특히 육신이 무너지고 통증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 오늘을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실존적 결단에 가깝다. 그것은 삶을 미래로만 미루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겠다는 태도이다.

오늘을 사랑한다는 것은 조건이 좋아서가 아니라, 조건과 무관하게 삶을 긍정하겠다는 선택이다.



내일을 사랑하겠다는 인간의 존엄


이 시의 마지막은 조용하지만 강하다. ‘사랑하련다’라는 미래형에는 확신도 보장도 없다. 다만 내일이 오면 다시 사랑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다. 철학적으로 이는 희망이라기보다 존엄에 가깝다. 인간은 미래를 통제할 수 없지만, 미래를 대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이 시는 그 선택을 사랑이라는 말로 정리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황혼의 시가 아니라, 끝까지 인간으로 남으려는 존재의 선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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