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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또 다른 고향 윤동주》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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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고향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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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두운 밤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 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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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또 다른 고향’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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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 청년의 고독과 시대적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살았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절망 속에서도 인간적 존엄과 순결한 영혼을 지키려는 투쟁의 기록이다.

그 가운데 〈또 다른 고향〉은 ‘고향’이라는 공간을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닌 영혼의 귀환지, 내세적 이상향으로 재해석하며, 윤동주 문학의 영원한 주제를 집약한다.

이 작품은 ‘죽음과 삶’, ‘백골과 혼’, ‘쫓김과 귀환’이라는 이중적 상징 구조를 통해 시인의 내적 순례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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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온 날 밤 귀환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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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행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라는 구절은 이미 죽음을 전제한 귀환이다. 윤동주에게 고향은 만주 북간도의 시골 마을이자 동시에 그리움과 상실이 교차하는 정신적 원형이다.

그러나 여기서 고향은 현실 공간을 넘어 죽음 뒤의 영원한 고향을 암시한다. 따라서 귀향은 단순한 귀소 본능이 아니라 영혼의 안식처를 찾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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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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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이 구절은 충격적이다.

살아 있는 청년 시인이 스스로를 이미 백골로 규정한다. 이는 시대적 죽음 의식, 즉 일제 식민 체제 속에서 이미 죽은 존재로 살아간 청년의 자의식이다. 동시에 ‘백골’은 순결과 정화된 본질을 상징한다. 육신은 부패해도 백골은 남는다. 시인은 ‘백골’을 통해 정신의 불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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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과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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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늘 밤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어두운 밤은 우주로 통하고”라는 구절은 그의 시 세계가 단순히 개인적 고독을 넘어 코스모로지(우주론적 상상)로 뻗어 있음을 보여준다. 밤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와 인간 영혼의 교차점이다. 윤동주는 ‘밤’을 통해 자기 존재를 영원성의 지평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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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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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윤동주에게 바람은 흔히 자연과 영혼을 매개하는 존재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감지된다. 여기서 바람은 우주와 인간, 죽음과 생명을 잇는 소리 없는 소리다.

윤동주는 바람을 영혼의 언어로 듣는다. 이 바람은 어둠 속 ‘풍화작용’을 일으키며, 인간의 백골까지도 우주의 질서 안에 편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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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화작용의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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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이라는 구절은 윤동주 시의 핵심적 상징이다. 풍화작용은 자연의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닳게 하고 갈아내는 과정이다.

시인은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환원한다. 이는 허무가 아니라 순환이다. 풍화는 소멸이면서 동시에 정화다. 윤동주는 죽음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영혼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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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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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이 삼중 구조는 자아의 분열을 드러낸다. 육체(나), 유해(백골), 영혼(혼)이라는 세 층위가 동시에 운다.

윤동주는 여기서 인간 존재의 삼중적 구조를 해체하면서, 진정한 주체는 혼임을 드러낸다. 울음은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영혼의 통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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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 높은 개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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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개는 충직과 지조의 상징이다.

그러나 동시에 개의 짖음은 위협과 추적의 상징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이를 역설적으로 배치한다.

‘지조 높은 개’는 시인을 감시하는 시대의 압박이자, 동시에 그를 끝까지 지켜보는 양심이다.

짖음은 경계와 추적의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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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짓는 개와 추적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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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시인은 결국 쫓기는 자다. 윤동주의 생애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민족 청년의 쫓김의 역사였다.

그는 현실에서 일제 경찰과 감시의 공포 속에 살았고, 내면에서는 양심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개의 짖음은 외적 탄압과 내적 양심의 중첩된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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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 우는 사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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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가자, 쫓기 우는 사람처럼 가자.” 여기서 시인은 능동적 주체가 아닌 피동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한다.

그러나 이 피동성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는 이동, 순례를 선택한다. 쫓김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발걸음, 이것이 윤동주의 시학이다.

시는 늘 멈추지 않는 순례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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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고향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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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구절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는 시 전체의 정점이다.

여기서 고향은 단순한 지리적 귀향이 아니다.

‘또 다른 고향’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고향, 혹은 이상향이다. 백골은 현실적 죽음을 상징하지만, 그 너머에 영혼이 도달할 새로운 고향이 있다. 윤동주는 이를 통해 죽음 너머의 생명, 절망 너머의 희망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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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고향’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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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고향은 단순히 북간도의 농촌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본향이며, 동시에 민족의 고향이다. 일제 식민지 현실 속에서 고향은 상실되었고, 시인은 새로운 고향을 찾아야 했다.

‘또 다른 고향’은 민족의 해방된 미래일 수도 있고, 시인의 영혼이 도달할 천상의 나라일 수도 있다.

이중적 의미가 중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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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순례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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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고향〉은 윤동주의 시학에서 중요한 ‘순례 모티프’를 집약한다. 그는 늘 길 위에 있었다.

길은 귀향의 길이면서 동시에 추방의 길이었다.

그는 자기 백골을 지고 떠나는 순례자였다.

이 작품은 그가 얼마나 죽음을 내면화한 순례자였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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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색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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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시에는 기독교 신앙의 흔적이 깊다. ‘백골 몰래’라는 표현은 육체를 넘어 영혼의 부활을 상징한다. 또 다른 고향은 성경적 천국, 새 예루살렘을 연상시킨다. 윤동주의 신앙은 절망을 뚫고 부활을 지향하게 했다.

따라서 이 시는 순교적 신앙 고백의 성격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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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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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써진 1941~42년은 윤동주가 일본 유학 중이었고, 이미 조국의 현실은 전시체제로 깊이 들어가 있었다. 청년 윤동주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글을 쓰는 자기 운명을 직시했다.

“백골”과 “쫓김”은 당시 젊은이들이 실제로 겪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단순한 개인적 명상이 아니라 시대 전체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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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상징의 독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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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언어는 단순하지만 심연을 품고 있다.

백골, 어둠, 개, 바람, 고향 — 이 단어들은 누구나 아는 단어다.

그러나 윤동주는 이를 통해 시대와 영혼을 동시에 담아내는 심층 상징체계를 구축했다.

그의 언어는 투명하지만, 그 투명성 속에 깊은 영적 밀도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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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정신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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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고향〉은 윤동주 정신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영혼의 순결이다.

그는 이미 백골이 되어 쫓기 우는 자로 살았지만, 끝내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꿈꾸었다. 이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죽음 너머의 희망을 향한 항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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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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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식민지 문학이 흔히 저항의 직접적 언어로 가득할 때, 윤동주는 내적 성찰과 영적 저항의 언어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죽음을 노래하면서도 영혼의 존엄을 끝내 지켜냈다. 이는 한국 문학에서 드문 숭고한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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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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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이 시를 읽을 때,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는 달라졌으나, 인간은 여전히 ‘쫓기 우는 존재’다.

현대 사회의 억압과 불안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고향을 찾는다. 윤동주의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의 또 다른 고향은 어디인가?”

그의 시는 여전히 현재적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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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윤동주 시혼의 영원성

〈또 다른 고향〉은 윤동주의 시혼이 응축된 결정체다. 그는 이미 자기 백골을 지고 어둠 속을 걸었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그 길에서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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