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안광석 시인-비움》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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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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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석


산을 오르며 나무에게 묻는다

늘 푸름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땀을 식히며 나의 심장은

얼마만큼 부풀어야

바람소리를 느낄 수 있는가를


숲길을 걸으며 나의 가슴을

얼마나 비워야 나무를 닮아

갈 수 있는가를


산을 내려오며 나무에게 묻는다

왜 나뭇잎을 떨구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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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비우는 법, 세계가 들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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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석 시인의 〈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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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답’이 아니라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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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을 읽으면 무엇인가를 배웠다는 느낌보다, 무언가가 내 안에서 조용히 움직였다는 감각이 먼저 온다. 이 시는 자연을 설명하지 않는다. 산과 나무, 숲길과 잎은 풍경이 아니다. 사유를 일으키는 사유의 시다. 시가 하는 일은 해설이 아니라 질문이다. 질문은 지식을 늘리지 않는다. 대신 존재의 자세를 바꾼다.

이 시는 독자의 생각을 설득하지 않고, 독자의 생각을 느리게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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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묻는다”는 말은 자연을 해석하겠다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 중심의 확신을 잠시 내려놓겠다는 선언문에 가깝다. 질문은 언제나 비움에서 시작한다. 알고 있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자신과 세계는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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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른다는 것, 몸과 마음의 어긋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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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른다는 행위에는 늘 목적이 따라붙는다. 정상, 성취, 조망. 그러나 이 시에서 오름은 전진이 아니라 점검이다. 올라갈수록 숨은 가빠지고, 땀은 흐르며, 몸은 자기 존재를 크게 드러낸다. 시인은 그 순간 나무에게 묻는다. 산을 보지 않고, 몸을 과신하지도 않는다. 대신 몸이 얼마나 부풀어 있는지를 가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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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산이 아니라 몸이다. 몸은 세계를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는 몸의 확장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오름은 마음을 낮추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몸은 위로 가지만, 마음은 아래로 내려간다. 이 어긋남이 이 시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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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름’이라는 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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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름을 간직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찬사가 아니다.

오히려 ‘늘’이라는 말에 대한 의심이다.

늘 푸르다는 말은 변하지 않겠다는 욕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변하지 않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변함으로써 지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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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푸름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다.

계절을 통과하며 그때그때 살아내는 방식이다. 푸름은 본질이 아니라 사건이다. 그래서 “간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존재론적 질문이 된다. 너는 무엇으로 지속하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붙들고 지속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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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말로 답하지 않는다. 대신 구조로 답한다. 잎이 있어도 나무이고, 잎이 없어도 나무다. 존재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이며, 본질은 고정된 표식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되풀이되는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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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식히며, 사유는 몸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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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연의 “땀을 식히며”라는 구절은 이 시의 사유 방향을 결정한다. 사유는 차가운 관념에서 나오지 않는다. 뜨거운 몸이 식어갈 때, 비로소 사유는 시작한다.

땀은 세계와 몸이 부딪친 흔적이다.

그 열기를 가라앉히는 순간, 세계의 소리가 들어올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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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말한다. 사유는 먼저 몸에서 시작된다고. 그리고 머리에서 사유가 발생한다. 인간은 자신의 열기를 낮출 때, 비로소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그 바람은 자연의 소리이면서, 동시에 자기 내면에서 울리는 미세한 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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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커질수록, 세계는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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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심장은 얼마만큼 부풀어야 바람소리를 느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역설을 품고 있다. 심장이 부풀수록, 인간은 자기 소리로 가득 찬다. 자기 소리가 가득한 곳에는 바람이 머물지 않는다.

바람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강해지는 일이 아니라, 함께 울리는 일이다.

공명은 힘에서 오지 않는다.

여백에서 생긴다. 이 시는 확장의 윤리가 아니라, 공명의 윤리를 선택한다.

주체가 세계를 정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울리는 방식으로 존재를 옮겨 놓는다.

심장을 부풀리는 대신, 심장 안의 소음을 줄일 때 바람은 소리가 아니라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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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걷는다는 것, 삶의 속도를 낮추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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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은 곧지 않다. 계획대로 열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숲길은 인간의 시간을 훈련한다. 이 시에서 걷기는 이동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연습이다. 숲길을 걸으며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는지를 몸으로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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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슴을 얼마나 비워야”라는 질문은 도덕적 훈계가 아니다. 인식의 질문이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세계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하는가. 내 가슴을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통로를 여는 일이다. 마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길처럼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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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닮는다는 것, 존재의 균형의 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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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닮는다는 것은 흉내가 아니다.

나무의 형태를 따라 하겠다는 뜻도 아니다. 이 시에서 닮음은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방식에 대한 배움이다. 나무는 혼자 살지 않는다. 바람과 햇빛, 비와 흙과 끊임없이 상호 의존하며 협상하며 산다. 나무의 삶은 독립이 아니라 상호의존이다.

나무는 위로 자라지만, 그 높이는 뿌리의 깊이를 배반하지 않는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종종 뿌리를 잃지만, 나무는 성장할수록 더 깊이 뿌리내린다. 나무를 닮는다는 것은 위로 가려는 욕망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위로 갈수록 아래를 잊지 않는 균형을 배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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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며, 철학은 여기서 완성된다


이 시의 마지막은 오름이 아니라 내려옴이다. 정상은 짧고, 내려오는 길은 길다. 철학은 정상의 환희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산의 현실에서 완성된다.

내려오며 다시 나무에게 묻는다는 것은, 깨달음의 흥분을 내려놓고 삶의 자리에서 다시 질문하겠다는 태도다. 이 시가 성숙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깨달음은 감탄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으로 옮겨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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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을 떨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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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뭇잎을 떨구는가.” 이 질문은 이 시 전체를 관통한다. 나뭇잎은 장식이 아니다. 생명 활동의 도구이며, 동시에 계절의 무게다. 나무는 잎을 떨구며 자신을 가볍게 한다. 가벼워지지 않으면 겨울을 견딜 수 없다.

이 떨굼은 포기가 아니다. 순환이라 할 수 있다. 변하지 않으려는 집착을 내려놓을 때, 생은 오히려 더 오래 지속된다.

인간은 잎을 떨구는 일을 실패처럼 여기지만, 자연은 그것을 살아남는 지혜로 삼는다.

이 시에서 비움은 공허가 아니라 생의 자유로운 경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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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비움은 사라짐이 아니라, 다시 들리기 시작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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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은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멈추게 한다.

산을 오르다 말고, 땀을 닦다 말고, 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늦추게 한다.

이 시를 읽고 나면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보다, 무엇을 아직도 꼭 쥐고 있는지가 먼저 떠오른다.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잎을 떨구는 몸으로 이미 충분히 말하고 있다.

비운다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다. 세계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안광석 시인은 산을 오르면서 비움에 대하여

물었다. 그리고 산을 내려오며 한번 더 묻는다

나뭇잎을 떨구는가를..

나무가 생명을 보여주는 방식은 푸른 잎이다. 생명이 주된 나뭇잎은

시인에게 비움을 통한 소리는 들었는지를 반대로 묻고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대답이 무엇일찌라도

독자들의 비움의 생각이 깊어지는 사유의 시로서 삶을 한 번쯤 깊이 고민하게 하는 시로 수작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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