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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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윤동주
선유미
인왕산 숲길에서
윤동주 시인을 만났다
식민지로 사는 것은
피를 흘리며 사는 노예의 삶이다
나라를 잃은 조선의 시인들이
마루타 되어 죽었다
인왕산을 타고 흐르는
하늘의 고함소리, 폭포의 한숨소리,
나무의 울음소리
다정하게 머리를 헤아리고 말을 건넨다
고단한 마음이 쉬어가는
알맹이 깊은 시를 쓰라고
숲의 바람은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시심을 깨우는 숲길에서
윤동주 시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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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시작되는 윤동주의 현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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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추모의 언어로 출발하지 않는다.
화자는 인왕산 숲길이라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윤동주를 ‘만난다’.
이 만남은 기념이 아니라 재현이며, 기억이 아니라 호출이다. 윤동주는 과거의 시인이 아니라, 지금 이 숲길을 걷는 화자의 내면에서 다시 말을 건네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는 윤동주 시정신의 핵심인 ‘현재형 양심’을 정면으로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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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인식의 회피 없는 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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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로 사는 것은 / 피를 흘리며 사는 노예의 삶이다”라는 문장은 완곡하지 않다. 윤동주가 끝까지 외면하지 않았던 식민지의 본질을, 이 시는 감상이나 은유 없이 정면으로 말한다. 윤동주의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순결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폭력을 끝내 윤리의 언어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 태도를 정확히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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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타’라는 잔혹한 정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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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은 조선의 시인들이 ‘마루타 되어 죽었다’는 진술은 독자를 멈춰 세운다.
그러나 이 잔혹함은 과장이 아니다. 윤동주를 포함한 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되었던 역사적 진실을 이 시는 흐리지 않는다.
윤동주를 성스러운 희생으로 미화하지 않고, 제국의 폭력 속에서 파괴된 한 인간으로 다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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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증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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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폭포, 나무는 이 시에서 풍경이 아니다. 그것들은 소리를 낸다.
고함치고, 한숨 쉬고, 운다. 말하지 못한 역사의 감정이 자연의 음성으로 전이된다.
이는 윤동주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자연의 윤리적 기능과 맞닿아 있다.
자연은 침묵하지 않으며, 인간이 외면한 진실을 대신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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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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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소리들이 “다정하게 머리를 헤아리고 말을 건넨다”는 장면은 이 시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여기서 다정함은 위로가 아니다. 윤동주에게 다정함은 자기 연민이 아니라 자기 엄격함으로 이어지는 감정이었다.
이 시의 다정함 또한 화자를 안심시키지 않고, 다시 써야 할 이유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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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깊은 시’라는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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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화자에게 쉬어가라고 말하면서도, 얕게 쓰지 말라고 요구한다. ‘알맹이 깊은 시’는 윤동주 시정신의 요약이다.
그는 끝까지 시를 도덕의 문제로 남겨두었다.
이 구절은 오늘의 시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피하며, 무엇을 말하지 않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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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로 돌아오는 시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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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바람이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는 장면에서, 메아리는 반복이 아니라 각성이다. 윤동주의 시는 끝난 적이 없다. 읽는 이의 양심에 닿을 때마다 다시 울린다.
이 시는 그 메아리를 듣는 순간을 포착하며, 시가 독자를 변화시키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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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심을 깨운다는 말의 엄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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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심은 감정이 아니다. 윤동주에게 시심은 삶의 태도였다.
이 시에서 시심을 깨운다는 것은 다시 부끄러워질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숲길에서의 만남은 감동의 체험이 아니라,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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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다는 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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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다시 윤동주를 만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반복은 원점 회귀가 아니다.
처음의 만남이 인식이었다면, 마지막의 만남은 결단이다. 윤동주는 더 이상 숲에 있는 시인이 아니다.
그는 오늘도 시를 쓰는 이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양심이다. 선유미 시인은
윤동주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다시 감당해야 할 존재로 세웁니다.
어머니의 정원 선유미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축하드리며
민족시인 윤동주를 사랑하는 깊은 울림을
되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