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스텔라 황의 북토크 후기에 달하님이 느낀 스텔라황 세 가지에 대하여 글을 띄웁니다. 미국의 한 도시 중환자실에서 고군분투하는 의사 스텔라황 그녀가 궁금하였다.
한가람미술관에서의 뭉크전에 병든 아이를 클릭하며 라이킷 한 스텔라황이 궁금하였던 차에 "작가 달하님"덕분에 용기를 내어 달하님 마음까지 함께 글에 담았다. 아가들의 죽음을 자주 봐야 하는 스텔라 황의 심정은 애처롭도록 눈물겹다.
의사였지만 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운명 같은 직업을 맡은 신생아 중환자실에서의 "병든 아이"에게 내미는 황의 손이 애잔하다. 어루만지는 손 스텔라 황의 손은 따뜻한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어린 영혼을 만지는 손이기에 그렇다.
스텔라 황의 손에 닿을 듯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꺼져가는 촛불! 병든 아이에게 내미는 손은 늘 떨림이었다. 죽음 앞에 매번 "우는 의사 스텔라 황" 병든 아가에 죽음의 이유도 다양할 텐데... 그 애잔한 슬픔 앞에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황의 마음은 누가 일으켜줄까?
인간은 신이 아니다. 그래서 슬픔과, 고통마저 감당해야 한다. 스텔라 북토크에 남긴 말 에밀리 디킨슨의 "사랑이 전부다"를 인용한말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인류의 대명사로 북토크의 첫 번째 말은 "사랑이 전부다."
"다소니"는 사랑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다."사랑이 전부다."는 나의 아내 김은심 시인의 사랑은 "사랑의 마침표"다. 사랑은 "사랑의 결정체"다.
와 의미가 동일하여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마라톤 완주를 하는 스텔라 황, 달하님의 운명 같은 북토크의 만남과 "달하님의 운명 같은 일"에도... 김은심시인의 "사랑의 결정체" 모두가 아름다운 글이다.
"사랑의 하모니"이다. 신생아실에서의 다급한 어린 생명나무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텔라 황의 손이 늘 마를 날이 없이 돌아서서 급하게 손으로 눈물 닦는 모습들이 그려져서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만 떨어진다.
고 이선균의 죽음과, 명예회복을 위해 이틀간을 꼬박 60편의 추모시를 아내와 함께 공저하여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의 "부부시인의 심정"과, 작은 생명이지만 더 애틋함이 묻어나는 스텔라황의 심정은 아이와 어른의 차이일 뿐 꺼져가는 "죽음"앞에 어루만져보는 슬픔은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다.
북토크 두 번째, "아이들은 살아있으면" 됩니다. 단테의 명언 중 "오늘의 날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보는 세상 스텔라황이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보는 일상의 순간순간이 살아만 주어도 행복한 것이다.
신생아 중환자실의 공간에서 21세기 테레사의 두 손 모아 사랑의 절실한 기도를 드리는 스텔라 황의 손이 커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는 8시간의 대수술을 두 번이나 한 행운의 주인공이다. <살아있기에> 중환자실 그것도 신생아실에서 날마다 겫으면서 첫책 <사랑은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다>의 작가 "황"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아이들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스텔라 황과, 신생아실에서의 부모들과의 숨 막히는 삶의 현장에서 치열한 어린 꽃들의 생명의 이야기들이 계속 진행 중인 의사의 존재가 어린아이의 죽음 앞에 울어야 하는 의사 황이 있기에..
."미국의 한 도시에 병원 이야기"가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유명한 "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론가"가 박성진을 천재시인으로 평하여서 몸 둘 바를 모른다. 시인이기전에 사람이다. 신생아 중환자실 "의사"다. 그리고, 의사도 사람이다. 인류는 사람이 만들어 나간다.
마지막 북토크 세 번째,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로도 마음이 전해져요" 의료진과, 부모가 함께 최선을 다했지만 아이를 잃었을 때 아이를 보내야 하는 부모와 그 공간 속에 함께 있는 작가 스텔라 황의 북토크 후기에 달하님이 느낀 스텔라황 세 가지에 대하여 글을 대신하여 쓴 시인도 신생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작가이자 의사인 스텔라 황의 북토크가 또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면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40> 중에 이 "한절"의 성경말씀이 사랑의 실천을 하시는 스텔라 황에게 큰 위로가 되시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