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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알송알 Jun 17. 2023

보느냐 먹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텃밭인가 꽃밭인가

손바닥보다 작고 콧구멍보다 조금 더 큰 텃밭을 가꾸고 있다. 5 평이 안된다. ‘에게?’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바질, 상추, 비타민채, 방울토마토, 파프리카, 양상추와 쑥갓을 심었다.


20여 년 전에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지어 본 것이 생애 처음이었다. 그때도 짓다가 힘들고 지쳐서 봉숭아꽃씨를  뿌렸었다. 주말 농장 주인 할아버지의 어리둥절한 눈빛이 아직도 선하다. 내 인생에 농사는 다시없을 줄 알았는데 세월이 돌고 돌아 다시 농사를 짓게 되었다. ‘에게게’라는 소리가 또 들린다. 농사라고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암튼 지건 작물을 키우고 있다.


시작은 창대하였다. 무엇을 키우고 가꿔 먹을 것인가? 감자, 옥수수, 고구마와 방울토마토 농사를 짓고 싶었다. 남편과 내가 잘 먹는 것을 적어 보니 구황작물 목록이 되었다. 그런데 감자와 고구마는 멧돼지를 불러들이게 된다는 충고가 들어왔다. 우리 집이 산 바로 아래에 있어 그렇단다. 멧돼지와 구황작물을 두고 다퉈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울타리를 튼튼하게 만들거나 개를 키우던가 해야 한다. 굳이 멧돼지와 다투고 싶지 않아 포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멧돼지가 무섭다.


구황작물 대신 상추, 비타민채, 방물토마토, 양상추, 파프리카와 쑥갓을 심었다. 또 구황작물이다. 아침마다 샐러드를 주로 먹는 우리 집의 구황작물이라 할 수 있겠다. 농사의 ‘ㄴ’ 자도 제대로 모르면서 모종이 아니라 씨앗을 뿌렸다. 작물별로 파종한 날짜는 다르지만 3월 말에서 4월 초에 다 심었다. 심기만 하면 새싹이 쑤욱 올라오는 줄 알았는데 싹이 나올 기미가 통 보이지 않았다.  씨앗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날이 따뜻해지면서 하나 둘 싹이 나고 자라기 시작했다.


상추는 쑥쑥 자란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뜯어도 뜯어도 다음 날이면 새 잎이 인사한다. 모든 작물이 상추처럼 자라면 나도 좋은 농부가 될 수 있을 텐데… 양상추는 딱 1 포기 살아남았다. 비타민채도 제법 잘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장에서 팔고 있는 비타민채를 보니 우리 집 비타민채는 소꿉장난의 소품처럼 보인다. 방울토마토는 가을에나 먹을 수 있으려나? 가을에라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파프리카도 먹을 날이 오기는 올라나.


쑥갓을 조금 더 먹어보겠다고 꽃대를 잘라 두었더니 꽃봉우리가 꽃으로 피어나 인사한다


쑥갓은 모종을 심었다. 이웃이 심고 남았다며 준 모종이다. 씨를 뿌린 작물에 비하면 쑥쑥 크는 게 눈에 보인다. 우리 가족이 먹는 속도보다 몇 배 빠르게 크더니 며칠 전 꽃대가 많이 올라왔다. 꽃이 피면 억세서 먹지 못한 냉이와 뽑아 먹지 않고 두면 노랗게 꽃으로 피어났던 유채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쑥갓도 더 이상 못 먹는다는 말인가? 순 지르기도 안 하고 부지런히 따먹지도 않았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창대했던 시작과 달리 미미한 끝이 다가오는 기분이다.


그런데 쑥갓꽃이 이쁘다. 아주 많이 이쁘다. 그러고 보니 냉이꽃도 유채꽃도 이뻤다. 그래 뭐, 수확 못하면 어떠리. 예쁜 꽃과 초록을 실컷 즐기면 되는 거다. 보느냐, 먹느냐- 아무래도 우리 집 텃밭 농사는 입이 아니라 눈으로 즐기는 농사가 될 것 같다. 크지도 않고 땅에 딱 붙어있던 비타민채에도 꽃이 피었다. 자그마한 꽃이 또 이쁘다.


텃밭농사를 제대로 못해서 먹을 것이 없느냐. 그건 아니다. 이웃들이 많이 나눠 주신다. 친절하고 넉넉한 마음씨의 이웃 덕분에 굳이 내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래, 텃밭 말고 꽃밭 하자.  


한 두 송이 피던 쑥갓꽃이 순식간에 텃밭을 꽃밭으로 만들었다


#브라보문경라이프 #문경일기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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