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알송알 Sep 06. 2023

풀이 눈치를 준다.

좀 뽑으세요


풀이 정말 잘 자란다. 잠도 안 자고 숨도 쉬지 않고 크는 것처럼 보인다. 경이롭고 놀랍고 이제는 두렵다. 장마 후 풀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항복이다. 항복. 속상하지만 감당이 안된다.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마당에 있는 꽃밭과 꽃밭보다 더 작은 텃밭의 풀은 눈에 보일 때마다 뽑는다. 덕분에 토마토, 파프리카, 상추는 실컷 먹었다. 문제는 뒷밭이다.


우리 집은 텃밭이 2개 있다. 초보가 텃밭을 두 개씩이나? 물론 나와 남편의 의지는 아니다. 앞마당에 있는 2.5평의 텃밭과 뒷마당에 붙어있는 텃밭이 있다.  작은 텃밭도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옆집 시누이께서 땅을 보태셨다. 이왕 시작한 김에 심고 싶은 거 다 심고 마음대로 한 번 해보라며 밭을 내어 주셨다. 30평은 되려나? 내 눈에는 망망대해처럼 보인다. 우리 집 뒷마당과 붙어 있어 오고 가기는 편하다. 감자와 고구마를 심고 싶었는데 멧돼지를 불러들이는 작물이라 안된단다.


먼저 과일나무를 심었다. 나무 심기도 처음에 반대가 많았지만 때마침 문경시 산림조합에서 나무 나눔 행사를 했다. 대추, 체리, 매실나무는 무료로 받아 블루베리 나무는 구입해서 심었다. 나무를 심고 남은 땅에는 콩, 호박, 해바라기, 바질을 심었다. 6월과 7월 , 콩수확을 하고 호박을 따먹고 해바라기 꽃이 활짝 피었을 때는 좋았다. 그때는 풀을 오며 가며 조금씩 뽑아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이후 장마와 뜨거운 햇빛을 먹은 풀들이 막막 자란다. 이른 아침과 초저녁이 아니면 풀 뽑기가 불가능하다. 봄에 심은 과일나무는 올해는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콩과 바질 수확은 끝냈고 호박도 실컷 따먹었고 해바라기꽃은 졌다. 며칠에 한 번씩 비가 내려 나무에 자주 물을 주지 않아도 되니 밭으로 가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그러는 사이 텃밭은 조금씩 풀밭이 되고 밀림이 되었다.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친 기분이다. 만시지탄이란 말을 써본다. ‘이렇게 된 거 어쩌겠나, 어쩔 수 없다. 풀은 찬바람 불면 순리대로 사그라지겠지 뭐.’


그런데 눈치가 보인다. ‘저 사람들 밭은 왜 저 모양이야? 풀을 안 뽑고 왜 그냥 두는 걸까? 풀 뽑고 그 자리에 다른 작물을 심어야지 왜 안 하지? 설령 농사는 안 짓는다고 해도 너무 지저분하잖아. ’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소리는 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들은 것 같은 기분이다. 동네 어른들이 우리 뒷밭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릴 것 같지 않은데도 신경이 쓰인다. 며칠 전 이장님이 예초기로 마을길가의 풀을 깎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산책하는 마을 길이 말끔해졌다. 우리도 풀을 뽑아야겠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풀을 뽑았다. 남편은 남의 눈치 볼 것 없다며 꿈쩍도 안 한다. 혼자서 40분쯤 했나. 땀범벅이다. 다리도 후들거리고 얼굴은 빨갛게 익었다. 나는 힘들어 쓰러질 것 같은데 티가 너무 안 난다. 하루가 지나면 내가 뽑은 자리에도 새로운 풀이 빼꼼 얼굴을 내밀 것 같다. 신경질이 났다. 내가 살다 살다, 풀에게 눈치를 볼 줄이야. 가수 나훈아 씨의 잡초라는 노래까지 미워질 판이다. 이름 모를 풀들아, 나한테 왜 그래? 이름이 있는데 불러주지 않아서 그런 거니? 정녕 풀을 그대로 두면 안 되는 겁니까? 구시렁구시렁. 내년에는 이 지경이 되지 않도록 미리미리 단속을 잘해야겠다.  구시렁구시렁.


#문경일기 #20230905




매거진의 이전글 달 보러 가자. 마당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