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을 여유 있게 보냈다. 팬데믹을 예외로 하면 한가하고 조용한 명절은 처음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참석 못하는 친척들이 있어 우리 가족 4명과 막내 시삼촌 내외분, 이렇게 6명이 차례를 지냈다. 보통은 10인용과 6인용 전기밥솥 2개에 그득하게 밥을 했는데 작은 밥솥 하나로 충분했다. 차례음식도 조상보다는 살아있는 우리들이 음복할 정도만 준비했다. 조상들에게는 죄송한 일이지만 음식이 남아서 버리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죄송하게 된다. 조상들도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내 딴에는 간단하게 한다고 했는데도 남았다. 한두 끼 먹을 정도 남았으니 이 정도면 됐다. 늘 이런 명절을 꿈꿨다. 그런데 뭔가 어색하다.
지금껏 명절은 늘 북적북적했다. 방 2개짜리 23평 아파트에 시아버지와 함께 살던 때, 특히 손님이 많았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굳이 세어보면 우리 가족 4명, 시할머니. 시아버지, 작은 시삼촌 내외, 막내 시삼촌 내외, 사촌 형제 부부 3쌍과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사촌 형제와 조카들을 합하면 20명이 넘었다. 음식 준비와 차례 지내는 1박 2일 동안 북적북적대었다. 말이 23평이지 실평수는 15평도 되지 않는 집이었다. 2개의 방에 어르신들 몇 분이 누워 계시고 작은 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눴다. 밥도 순서를 정해 먹었다. 밥상이 있어도 밥상을 한꺼번에 펼 공간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시가 식구들이 낯설고 어색하고 편하지 않아 그들 사이에 끼어 있기가 쉽지 않았다. 아파트 현관 앞 계단에 홀로 앉아 쉬곤 했다. 차례를 지내고 음복을 하고 설거지를 끝내고 뒷정리를 마치고 쉬고 싶어도 마음 편하게 엉덩이 붙이고 앉을 데가 없어 그랬다. 몇 년 후 집이 조금 넓어졌지만 여전히 복잡했다.
좁은 아파트에서 20명도 넘는 명절 손님을 치를 때마다 넓은 집을 바랐다. 공간을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해 우리 가족이 평소 사용하던 살림살이를 테트리스 쌓기 하듯 정리했다. 더 이상 테트리스 쌓기를 안 해도 될 만큼 새 집은 넓다. 북적북적대던 시절의 가족들이 다 누워도 된다. 20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다. 밥상도 있고 밥상을 펼 공간도 있는데 밥을 먹을 사람이 없다. 그동안 어르신 몇 분은 돌아가셨고 명절 차례를 따로 지내는 사촌 형제들도 생겼다. 올 추석에 오지 못한 친척들이 다 와도 이제는 10명 남짓이다. 이사하고 첫 명절이었던 지난 설은 바빴다. 이사와 명절 인사를 오는 손님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고 앞으로는 이번 추석처럼 여유롭고 한가한 명절이 될 터이다.
관계도 그렇다. 결혼 초기 가깝지도 친하지도 않은 친척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차례 준비는 버겁고 밥은 소화가 안되고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해서 피곤했다. 남자들은 놀고 여자들만 일하는, 가부장적 질서와 권위를 내세우는 시가는 아니다. 며느리들의 일이 많기는 해도 남녀노소 모두 도와 명절 준비를 했다. 그럼에도 ‘관계’가 주는 고단함이 대단했다. 그래서 명절이 싫었다. 시가 식구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좁은 방에서도 시가 식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그럴 사람들이 없다.
예전에는 추석 차례를 지내고 일가친척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힘이 쪽 빠져 지쳐 널브러졌다.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달을 보려면 아파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럴 기운이 없었다. 명절 일기를 보면 매년 비슷했다. 달은 소원을 들어주려고 기다리고 있고 나는 드르렁거리며 자느라 소원을 빌지 못했다는 푸념 어린 일기를 쓰곤 했다. 그만큼 추석은 피곤한 날이었다.
올해 추석은 단출했고 한가했다. 달 구경 할 수 있는 힘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게다가 멀리 가지 않고 마당에만 나가도 보름달을 볼 수 있다. 나에게도 드디어 달 보며 소원을 빌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이럴 수가, 날이 흐려 달을 볼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한가하고 여유로운 추석이 낯선데 보름달도 안 보인다. 아이 참. 어색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