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안이 사라진다. 2024년 10월 31일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도 천리안 메일을 사용하고 있는 남편이 전해주지 않았으면 마지막 인사도 못할 뻔했다. 나는 사용하지 않으면서 계속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무슨 심보인가. MZ세대들은 무엇인지 모르거나, 통신위성 정도로 알고 있을 천리안. PC통신 서비스. 내가 처음 만난 온라인 세계. 그곳이 문을 닫는다니 마음이 복잡하다.
‘삐 삑 치이이이이익’ 요란한 모뎀소리와 함께 천리안 세계로 들어가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현실을 잊어도 너무 까맣게 잊어버리는 바람에 전화요금 폭탄이 터졌다. 고지서 앞에 온 가족이 모였다. ‘누가 국제 전화 했니?’ ‘아니요. 외국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요.‘ ‘통화는 간단히 하자.’ ‘네’ 내가 모른 척하는데 상황파악이 될 리 없었다. PC통신이 낯선 시절이었다. 나도 전화요금이 10만 원이 나올 줄 몰랐다. 학교 앞 중국 음식점의 짜장면 한 그릇을 500원이면 먹을 수 있는데, 온라인 세계에서 희희낙락한 대가로 짜장면 200그릇을 날렸다. 그 후 공대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학교 연구실에서 주로 천리안 서비스에 접속했다. 수업 빌 때, 지도 교수님 안 계실 때, 다른 친구들이 쓰지 않을 때 하느라 감질났지만 어쩌랴.
songazi - 천리안에서 사용했던 아이디이다. 멋지고 의미 있는 아이디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아이디는 이미 사용 중인 경우가 많았다. 내게 좋아 보이는 이름은 남들 눈에도 좋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찾다 찾다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songazi’로 했다. 온라인 세계이지만 내 이름을 내가 직접 짓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채팅 중에 어떤 아이가 ‘손가지‘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서 웃음보가 터진 적이 있다. ‘손가지’ 아니고 ‘송아지’이다. 천리안 이후 내 아이디의 뿌리는 ‘songazi’이다. 그대로 쓰거나 숫자나 알파벳 한 두 개를 붙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에 멋진 이름을 지었어야 했다. 손가지가 뭐람. 하하하.
내가 주로 이용했던 서비스는 채팅과 자료실이었다. 채팅으로 얼굴도 사는 곳도 나이도 이름도 모르고 아이디만 아는 이들과 수다를 떨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특정 주제의 자료실에 올라오는 글을 통해서는 다양한 정보를 얻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이전, 지방에 사는 나에게는 참으로 새롭고 신기한 정보였다. 그림과 사진 없이 오로지 텍스트로만 정보를 주고받아야 했지만 충분했다. 그림이 필요하면 텍스트를 조합해 그림을 그렸다. 아스키 아트( ASCII art )라고 하나? 나 때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 암튼 정감 있다.
천리안을 좋아하는 사용자에서 서비스 제공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천리안 서비스를 제공했던 회사, 데이콤에 입사했다. (성공한 덕후?) 그 무렵 데이콤은 천리안 서비스를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었다. 동시 접속자가 많아도 성능이 떨어지지 않도록 서비스를 개선하는 것과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선하는 프로젝트였다. 도스 모드 운영체제에서 윈도 모드 운영체제로 , PC통신에서 웹 기반 서비스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프로젝트 수행은 지지부진했고 우리 회사는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얼마 후 나는 퇴사했고 회사는 엘지에 인수합병되었고 천리안 서비스 분야는 독립시켜 운영했다고 듣긴 들었는데 나는 잘 모른다.
천리안이 사라진다. 그동안 관심 없었다. 퇴사 후에도 유료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사용했던 메일 서비스를 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래 놓고는 기분이 왜 이럴까. 내 청춘이 기록된 한 페이지가 지워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덕분에 ‘라떼는 말이야’ 내지는 ‘그때 그랬지’ 하면서 추억 여행은 실컷 했다.
아듀, 천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