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날이 따뜻해서 눈을 치우지 않아도 돼.”
식전 댓바람부터 눈을 쓸고 있는 나에게 시누이가 말했다. 이사 후 첫 한 달 동안 눈이 여섯 번이나 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에 눈이 조금이라도 쌓여 있으면 빗자루를 들고 나와 쓸었다. 처음 몇 번은 재미있었지만 슬슬 지겨워졌다. 그래도 눈을 치우지 않으면 얼어붙어 미끄러져 다칠까 봐 겁나서 열심히 치웠다. 이럴 수가? 시누이 말씀대로 해가 높이 떠오르자마자 눈이 금세 녹아 버렸다. 시골 생활 선배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다.
시누이 부부는 우리 옆집에 살고 있다. 가족의 이사로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오래 살았던 시누이는 당신이 다시 시골에서 살게 될 줄 몰랐다며 가끔 웃는다. 고향 사람 시매부를 만나 결혼하고 지금은 시매부의 고향 마을에서 살고 있다. ‘고향 사람’에서 고향은 ‘문경’을 의미하고 ‘고향 마을’의 ‘고향’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마을이다. 예전부터 시누이네를 방문할 때마다 감탄했었다. 하루 종일 햇빛을 품고 있는 집은 늘 환하고 따뜻해서 덩달아 내 기분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시골이사를 결정하고 나서 땅 구경 마을구경 집 구경에 시간을 들였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지 못해 시골로 이사하기 힘들겠다 싶었다. 마침 시누이네 옆집이 빈집이었다. 남향이고 땅도 크지 않고 위치도 마을 초입이 아니라 마음에 딱 들었다. 우리가 이사 와도 되는지 여쭤보니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집을 짓기로 결정하고부터 두 분이 애쓰셨다. 멀리 산다는 핑계로 자주 방문하지 못하는 우리 대신 빈집 철거에서부터 새집 완공까지 바로 옆에서 관리 감독 감수까지 꼼꼼하게 다 하셨다. ‘집 한 채 짓고 나면 10년은 늙는다.’는 말이 있다. 두 분 덕분에 우리는 참 쉽게 집을 지었다. 집을 짓고 4계절이 지났다. 살면 살수록 잘 지은 집이다. 시골집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단열이 완벽하다. 작년 겨울은 난방비 폭탄이니 뭐니 하면서 전국이 시끄러웠다. 그러지 않아도 시골 단독주택의 첫 난방비를 단단히 각오했었는데 예상보다 많이 들지 않았다.
이사 와서 첫 두 달은 매일 아침 티타임을 가졌다. 아침 식사 후 우리 집으로 건너온 두 분이 차를 마시며 해야 할 일과 방법을 일러주셨다. 나는 그 시간을 조회시간으로 불렀다. 집안만 관리하던 아파트 생활과 달리 안과 밖을 두루 살펴야 하는 단독주택 생활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모르는 것이 생기거나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걸거나 집으로 찾아가는 대신 메모해 두었다가 조회시간에 여쭸다. 우리들의 아침 조회가 없었다면 전화기가 불이 났거나 신발이 닳았을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날, 아침마다 우리 집으로 오시느라 귀찮지 않으셨을까? 나는 참 좋았다. 따뜻한 봄날, 우리 부부의 생활이 안정되면서부터 조회는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먹을거리도 두 분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내 텃밭은 아직 소꿉장난 수준이라 먹을거리가 거의 없었지만 두 분의 텃밭을 마치 내 밭처럼 이용했다. 봄날 삼동 초부터 초겨울 배추와 무까지, 우리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 보물창고이다. 가끔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너무 많이 주셔 감당하기 힘들 때도 있지만 감사하다. 식재료가 되는 채소 말고도 시누이네 옆에 있으니 먹을거리가 많이 생긴다. 시누이 친구분이 흠집이 있지만 먹어 보라며 시누이에게 준 사과는 상자 째 우리 집에 있다. 올해 사과 값이 비싸 먹기 힘들 줄 알았는데 덕분에 맛있게 잘 먹고 있다. 김장 김치도 조용히 심부름만 하면 생길 판이다.
지난여름에 우리 동네는 비 피해가 컸다. 이렇게 큰 비는 40여 년 만이라고 한다. 우리 집 옆에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그 길로 산에서 엄청난 물이 내려왔다. 물소리가 어찌나 큰지 마치 폭포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배수로가 없었다면 우리 집 마당으로 많은 물과 흙이 흘러 들어올 뻔했다. 배수로는 우리가 이사 오고 난 후 지난봄에 만들어졌다. 배수로 공사는 ‘이제 막 귀촌한 가족들이 안심하고 편안하게 살게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며 시매부께서 안면이 있는 시의원에게 꾸준히 넣은 민원에 대한 응답이었다.
우리는 두 분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물어본다. 어느 가게 짬뽕이 맛있는지, 콩나물 콩은 어디에서 파는지, 장 담그기는 언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자동차 정기 검사는 어디에서 하는 것이 편리한지, 마을 행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잔디는 얼마나 자주 깎아야 하는지, 창고를 지을 기술자는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지, 마을 산책로는 어떤 길이 좋은지, 어느 안경점이 친절하고 잘하는지, 밤에 집밖으로 나갈 일도 없는데 굳이 외등을 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산에서 본 버섯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종은 언제 심어야 하는지 등등 별별 것을 물어본다. 시간이 걸리면 우리가 살면서 깨우칠 수 있는 일도 있고 두 분이 알려주신 것이 우리에게 맞지 않기도 하다. 그럼에도 두 분이 가까이 있어 얼마나 듬직한지 모른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 동네가 시매부의 고향이라는 사실이다. 알게 모르게 그 덕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사 직후 마을 구경을 나갔을 때 일이다. 마을 여기저기를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낯선 사람이 의심스러웠는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누구냐고 따지듯이 어느 분이 물었다. 시매부의 성함을 듣자마자 그분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가끔 생각난다. 이장님도 잘 챙겨주신다. 시골의 텃세는 유명하지 않나. 우리 마을은 텃세가 그리 심하지 않은 곳이라는 말도 있지만 시누이 부부의 덕도 톡톡히 보고 있다.
시누이 부부는 우리 부부의 ‘치트키’이다. 치트키는 게임 상에서 사용하는 말로 게임을 더 쉽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속임수를 의미한다.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게임 세계와 달리 일상에서 사용할 때는 남들보다 빼어나다는 뜻을 가진다. 예를 들어 ‘A는 예능 치트키이다’라는 말에는 A가 출연한 예능프로그램은 믿고 볼 수 있을 만큼 A는 예능을 잘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우리 옆집에 사는 시누이 부부는 나의 치트키가 확실하다. 시골생활 치트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