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봉투
휴지 1장
약봉지
마트 영수증
씹던 껌 아니고 새 껌
아침에 뜯은 일력
굴러 다니고 있던 볼펜
책날개
책을 읽다가 멈춰야 할 때
가장 먼저 눈이 딱 마주치는 물건이
사르륵사르륵 내 책갈피가 된다
책을 집 여기저기에서 읽는다. 빨래를 삶거나 육수를 우리거나 할 때는 부엌 식탁에서, 보통은 햇빛이 잘 들어노는 거실 소파에서, 가끔은 책상에서, 춥고 피곤할 때는 침대에서 책을 읽는다. 한 번에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며칠에 걸쳐 (간신히) 책 한 권을 읽는 편이라 다음에 읽을 때를 대비하여 책갈피가 있어야 한다. 가름끈이 있는 책이면 편하지만 내가 주로 읽는 책에는 가름끈이 거의 없다. 암튼 그러다 보니 책갈피가 필요하고 우리 집에는 책갈피가 꽤 많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나눠주는 것을 서너 개씩 가져오기도 했고, 아이들과 내가 놀이 삼아 직접 만든 것도 있고, 기념품으로 구입한 금색이 반짝반짝거리는 금빛 책갈피도 있다. 그런데 말이지, 참 이상하다. 필요 없을 때는 흔하고 눈에 잘 보이던 물건들이 내가 너무나 필요하고 꼭 사용해야 할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이고 만물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농담이다.
본디 책갈피였던 것은 책장 위에 잘 모셔두고, 책을 덮자마자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사물들을 책갈피로 주로 사용하고 있다. 어느 날 그런 내가 웃겨서 수수께끼를 만들었다. ‘편지봉투, 휴지, 약봉지, 영수증, 책날개, 일력 종이 -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공감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나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 거다. 확실하다. 책을 더럽히거나 상하게 하지 않고 구분만 잘하면 되지 않겠나?
책갈피에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야구선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 사인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우연은 아니다. 그 선수가 유기견 후원 행사가 열리는 카페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고 갔다. 사인을 받기 위해 유니폼과 유성펜을 들고 가서 한참을 기다렸다. 음료를 마시고 지루해서 드립커피 한 상자를 구매했다. 그 선수를 눈앞에서 보기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떨결에 드립커피 상자를 내밀고 사인을 받았다. 드립커피가 5개 정도 들어있던 골판지 상자에 말이다. 주위에서 유니폼에 안 받냐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들고 갔던 유니폼은 그냥 그대로 들고 왔을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와서 골판지 상자를 자르고 코팅하고 끈을 달아 책갈피를 만들었다. 귀한 사인이지만 소중하게 보관하는 것보다 평소에 사용하면서 자주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잘 사용하다가 제 버릇 남에게 주지 못한다더니, 다시 또 눈에 보이는 물건을 책갈피로 사용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 소중한 사인, 아니 아니 책갈피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돼~~~~” 있을 만한 곳을 뒤졌지만 없었다. 책갈피로 만든 후에 읽었던 책을 하나씩 하나씩 훑어보았지만 없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에 딸려 갔나 싶어 도서관도 샅샅이(?) 뒤졌지만 없었다. 오 마이갓. 어떻게 받은 사인인데 … 아끼면 똥 되고 아끼지 않고 쓰다 보면 분실하는 건가.
그 책갈피는 한참 후에 가방 안에서 찾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 물건들은 가방 안에 대개 들어있는데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때는 이상하게 잘 안보이더라. 그 후로 사용하지 않고 잘 모셔두고 있다. 요즘 내가 책갈피로 주로 사용하는 물건은 포스트잇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으면 포스트잇을 하나 떼서 책장에 붙이고, 책을 잠시 덮어야 할 때는 책갈피로 쓴다. 딱 좋다. 그런데 내가 읽는 책에는 여전히 휴지, 봉투, 책날개, 영수증 등등이 가끔 끼여 있다.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