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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정 Jan 18. 2023

7화. 동박새 겨울사랑 동백꽃 숲에서 봄으로 지고

제2부. 떠나가는 배 꿈꾸는 다락

  몇 개의 칸이 몇 개의 방으로 달려야 하는가. 

  몇 개의 인생이 몇 필의 베로 짜여야 하는가.    

 

  막연한 기다림, 오지 않을 사람, 기다리는 여심.

  훠이 훠이 새를 쫓는 여인, 차라리 한 마리 새라면 좋을 것을…….     


  굵지 않은 가지, 오래 살아서 투박한 살들이 한데 모였다. 같은 흙살을 뚫고 나와 서로 다른 꿈들을 꾸지만 결국은 같은 흙살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무들, 수십 개의 가닥을 풀어헤쳤다. 붉은 꽃 야물게 피워내고 질기게 한 생을 살다 간 백일홍은 흔적이 없다. 꽃보다 먼저 온 잎사귀들은 꽃보다 나중에 길을 떠나고 지금은 빈 가지뿐, 이리저리 휘고 툭툭 볼가진 몰골이 수십 세월을 굶주린 넋의 관절인 양, 껍질은 벗겨지고 무르팍은 앙상하다. 붉은 노을은 추억으로 남은 지 오래, 빈 가지에 새들이 찾아든다. 그러나 봄은 아직 동구밖 서낭당에 이르지 못했고, 백일홍 빈가지들 무리 지어 서 있는 틈 사이로 드문드문 얼어붙은 흙살을 도탑게 안은 작은 꽃이 붉은 여심을 하얀 눈물에 가두었다. 하얀 눈물은 멀리서 비쳐오는 햇살에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혼곤해지는 숨을 차갑게 파고드는 바람으로 씻어 새기며 안으로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바람의 숨소리, 놈은 왜 거칠게 뜨거운가. 꽃잎이 데이면 어떻게 하라고, 노란 수술의 무더기 한 장의 손수건이 되고 말면 어떻게 하려고, 열아홉 청상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가. 도영, 너는 아느냐. 뜨겁게 데이는 나의 열아홉 순정을 너는 아느냐 말이다.'

  '대답이 없는 너를 두고 나는 걸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들 사이를. 툭툭 떨어진 목숨들이 붉게 타오르는 거리를. 너의 담장은 나를 가두고, 나의 이름 없는 벗들은 흩어진 지푸라기 사이에서 피를 쏟는데, 말없이 걷는 나의 정수리 위로 그늘을 드리우는 벗들이 나의 저고리를 적시고, 치마를 적시고, 버선발 수눅을 적셨다. 그 사이에도 도영, 너는 오지 않았다. 무심하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앉은 너럭바위는 거북의 형상을 닮아 달이 뜨는 밤이면 달빛에 젖어 우는데, 어버이들의 우정은 무엇을 바라고 이리도 치밀했던가.' 

  '용서치 않으리라. 도영,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오늘이 가고 있는 지금, 까치밥 여러 개 매달린 감나무 사이를 오고 가는 새가 홍시의 가슴을 후빈다. 부리가 뾰족하다. 콩알같이 까만 눈동자를 들어 주변을 살펴가며 단맛을 씹는다. 가느다란 다리를 어제 그랬던 것처럼 실팍한 가지에 붙이고 홍시의 터져버린 가슴 깊숙한 곳에 부리를 박고 단맛을 뽑아 올린다. 유록빛 털이 연둣빛으로 퍼지는 대가리 밑 목울대가 위로 솟았다 아래로 처진다. 뱃살이 불룩하다. 꽁지깃에 한껏 힘을 주고 버팅기며 단물을 삼키던 새가 콩콩거리는 발짓으로 날아오른다. 가지의 끝이 흔들린다. 새가 떠나간 자리,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 떠나간 새는 다시 온다. 

  붉은 꽃자리에 깃든 새가 꽃들 사이에서 고개를 살짝 틀어 밖을 본다. 무슨 소린가를 들은 모양이다. 호기심에 들뜬 콩알 같은 눈동자가 소리를 향해 반짝, 빛난다. 저를 닮은 새 한 마리가 날아온다. 입에는 무언가를 물었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저 앉은 나뭇가지의 틈을 본다. 빛깔이 곱다. 대가리에 얹은 유록빛은 검게 빛나고 눈알은 동글동글, 부리는 날카롭고 목둘레는 진초록에 황금빛 나비를 맸다. 옆구리 살을 잘록하게 덮고 있던 날갯죽지의 속살은 활짝 펴든 부챗살이다. 대나무를 잘게 잘라 맵시 있게 살을 넣은 합죽선의 모양이다. 살짝:궁 내려앉아 지그시 누르는 힘에 화들짝 놀란 꽃 대궁이 옆 가지가 기우뚱 휘다가 낭창거리며 올라선다. 무언가를 물고 있던 부리가 저의 부리를 날카롭게 스치고 저의 목울대에 파문이 이는 사이 틈은 좁아져 꽁지깃이 부딪친다. 아직 겨울눈을 감싼 아린(芽鱗)에 싸여 잠에 취한 꽃송이가 모르게 틈에서 틈 사이로 오고 간다. 마주친 부리에 놀라 옆으로 비켜서다가, 꽃잎 사이로 비친 눈동자에 놀라 돌아서다가, 콕콕 작은 알맹이 하나를 떼어 저에게 준다. 마음은 마음으로 전해지고 동박새의 겨울사랑은 동백꽃 숲에서 봄으로 진다.

  까치밥 붉은 홍시는 모든 것을 게워낸 빈 가지 끝에서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꽃자리에 머물면서 한 생을 살았던 꼭지는 비록 늙어 기운을 잃었으나 마지막 정열 겨울나무에서 굳었다. 

  슬픔도 황량한 심연(深淵)에서 붉은 흔적으로만 굳을 정열, 소희가 손끝에 잡혀 울고 있는 붓을 놓는다. 이 밤이 가면 담장 밖은 술렁이리라. 산머루빛 눈동자의 여자를 옭아매던 낡은 폐습은 유구한 역사의 뒤안에서 걸어 나와 뻣뻣하게 굳어버린 붓에 진하게 베인 먹물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리라. 

  '용서할 수 없는 사람, 그를 찾아가리라. 물으리라. 네가 무어냐고.'

  담장 밖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던 밤이면 손에 들려 떨고 있던 푸른 인(燐)의 날이 소희의 손끝에서 미세하게 떨린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소희를 담은 방을 환하게 밝히던 불은 꺼지고 소희는 홀로 앉아 어머니의 대청마루에 따사롭게 퍼지던 인정과 결별하며 퉁, 떨어지는 한 방울의 소리를 듣는다. 용서하시라는 말조차 버거운 밤, 차가운 눈물 한 방울은 굳으리라. 촛농이 되리라. 

  ‘스으읍 으윽 츠으읍……아악……’

  번개처럼 스치고 가는 강렬한 무엇이 소희의 손을 치고 간다. 번갯불 같은 번쩍임이 스치고 간 곳에서 비쳐드는 것은 부챗살, 낮에 본 새의 날갯죽지 안에서 빛나던 터럭이 소희 밖에서 일렁이고 있다. 


  합죽선, 그것은 새의 소리인가. 

  달빛, 그것은 난새[鸞鳥]의 거울인가. 

  춤을 춘다. 합죽선이 달빛을 끌어온다. ‘~딱 덩~ 퉁~~’ 도포자락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착 가라앉은 숨소리가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마루에서 퍼진다. 

  도포의 숨소리가 눈을 들어 허공을 본다. 무슨 시름에 겨움인가. 빙설의 허공을 뚫는 화살의 촉으로 겨누어 본다. 차가운 마루에 앉는 그림자, 방을 본다. 소희가 숨을 고른다. 그림자를 본다. 테가 넓은 갓을 쓴 그림자,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본다. 숨소리를 누르는 그림자, 팔을 들어 올려 한 점 별을 찍고 바닥에 닿은 부채를 편다. 하얀 종이의 살을 가르는 뼈대들, 그대로 한 권의 책이 되고, 팔을 둥그렇게 위로 올렸다 둥그렇게 쓸어내리며 책장을 넘기는 그림자, 또 한 장의 책갈피를 넘긴다. 반짝이는 별은 세상 밖에서 구름에 갇히고, 그림자 서생의 시름은 책장에 갇힌다. 책장을 접고 반짝이는 별을 응시해 보지만 그것은, 지금의 허상. 소희의 고독한 밤을 본다. 차라리 시나위 느린 진양조에 마음을 실어 저 여인에게 부친다면 고독한 절망은 싸늘한 재속에서 한 조각의 잉걸로 피어날 테지만…….

  '가여운 사람, 어디를 오겠다고, 나 있는 곳이 어딘 줄 알고 찾아오겠다는 것인가. 찾아온다고 이미 죽은 넋이 몇 백 겁을 같이 산다 한들 이승의 하루에 비길 것인가. 북망산천이라는 것이 생(生)의 마지막 길에서 부르는 만가(挽歌)의 한 구절이라고……. 그것은 회백색, 빛이 아니다. 다만 신기루, 곧 사라지는 것일 뿐.'     


  새를 쫓던 날, 하늘은 맑았다. 바람은 선들선들 불어와 붉은 백일홍 가지를 희롱했다. 파르르 떠는 꽃송이들, 그것들은 노루장의 웃음으로 화사하게 퍼져나가 보조개 깊은 곳에 떨어지곤 하였다. 

  “아씨, 저 꽃들은 어찌 저리 이쁠까요?”

  “그래. 가슴 저리게 예쁘구나.”

  “아씨, 우리 놀던 그 다락에 두고 온 가지들에서도 저렇게 이쁘게 피었을까요?”

  “다락? 그 다락?”

  “예. 아씨랑 함께 앉아 수를 놓다가 올라가면 바깥세상이 훤히 보이던 그 다락 말이요.”

  “그래. 피었겠지. 뜰 가득 피어서 담장을 둘렀을 것이고, 붉은 꽃물 연못이 되었겠지.”

  “그때는 좋았었는디…….”

  “지금은 안 좋은 게냐?”

  “안 좋다기보다는 심심헌디요.”

  실의 가닥들을 걸고 선 막대 쇠들 사이에서 손가락을 조물 거리며 천쪼가리를 묶어나가던 서운이가 목에 물기를 적셔가며 종알거린다. 저도 나름으로 지나간 시간들이 적적하고 대문 안에 갇혀 사는 나날이 무료하고 헛헛한 탓이라 짐작하지만 그지없이 안타까운 마음에 속이 에인다.

  “아씨, 우리 그때 왜, 마당가에 키 낮은 우물 있었잖아요?”

  “우물, 있었지.”

  “그 우물이 연못이라고 하면서 놀았었는디요.”

  “그래. 그때는 그랬었지.”

  “그때, 이렇게 꽃들이 한가득 피어나갖고 여름 마당에 꽉 들어차면 얼마나 좋았어라우?”

  “…….”

  “그때, 샘물에 꽃잎이 떨어져서 빙빙 돌면 아씨랑 지랑은 너무 좋아서 꽃붕어라고 허면서 놀았잖여라우.”

  “너도 기억하는구나.” 

  “아믄요. 그것을 어떻게 잊겄어요?”

  “꿈속이라고 잊어지겠느냐.”

  “왜애, 우리 그 꽃붕어한테 밥 준다고 보리 허치고 좁쌀도 허치고 그랬잖요?”

  “그랬었지. 꽃붕어들…… 지금은 누가 밥을 줄거나.”

  “긍께말이요. 언지라도 우리가 가갖꼬 밥 준다고 보리 허치고 쌀 허치고…… 멪칠 있다 오면 좋을 틴디요?”

  “꿈에라도 그럴 날이 있겠느냐.”

  “근디요, 아씨. 꽃은 그때 그 자리 꽃이나 여그 이 자리 꽃이나 다 같은 꽃일 틴디 어찌 다르다요이?”

  “마음이 다르지……꽃이 다를까.”

  “긍게 말여롸우. 근디, 거그 정읍에 핀 꽃은 아무리 뜨건 낮에 피어 있더래도 물기가 어린 것이 어딘지 촉촉허고 고슬고슬 혔는디이, 여그 핀 저놈의 꽃들은 오살나게 많이도 피어갖꼬 푸석푸석한 것들이 먼지를 뒤집어썼는가아 흐리멍텅히갖꼬는 사람 기운빠지게 허능구만요.”

  “……. 서운아, 꽃들에게도 귀가 있단다. 마음을 다 비치지 말아라. ……이 꽃들도 두고 가면 곧 그리워질 것들이란다.”     


  그 여름날 길은 멀었다. 두고 온 다락의 꽃들이 피고 지는 계절이 다 가도록 두고 온 꽃붕어 아직도 그곳에서 노닐고 있을까. 보리를 뿌렸다고 좁쌀을 뿌렸다고 눈을 흘기면서도 아버지한테 들키면 경을 친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식이지만 배고픈 들에서 허리 굽혀 피(잡초)를 뽑는 사람들에게 민망할 일이라 경계하실 거라고 조심을 시키던, 그날의 정답던 어머니, 그 살가운 꽃샘물이 오늘도 그리운데…… 하얀 명주실은 자꾸 길을 가자고 조른다.  

  날틀에 묶인 가락들, 그 실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길을 나선다.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 젖가슴 가운데에서 팔을 향해 뻗어 있는 뼈마디들,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핏줄들, 그 길을 따라 흐르는 피, 그 피로 물드는 길을 걷는 여자, 그 여자에게서 날실은 태어난다. 꽃붕어 먹이만큼이나 작은 크기의 구멍을 빠져나와 첫쇠 기둥에 묶이고, 열 자의 길이로 길을 나서는 열 가닥의 실마리, 중간쇠를 돌아든다. 곧게 가로질러 뻗은 마당에는 꽃들이 한창이다. 처마 밑 낙숫물이 동그랗게 파문을 일으키던 돌계단 틈서리에는 봉선화가 붉게 피어 흐드러지고, 뒤안으로 돌아드는 모퉁이에서는 오밀조밀하게 돋아나서 퍼지기를 잘하는 솔(부추) 잎 사이 꽃들이 장다리꽃과 키를 재며 몽실몽실 피어 있다. 어미의 젖을 먹으며 피워 올리는 아기의 옹알이처럼 몽글게 피어 뽀글거리는 흰빛깔이 실 가닥을 풀며 가는 소희의 눈길에 가득 찬다. 젖 냄새가 물씬 풍긴다. 

  제 손에 다 잡히지도 않는 돌을 들고는 둥근 막대기를 흙바닥에 퉁퉁 때려 박던 서운이의 손에서 중간쇠로 자리 잡은 놈이 제 몸을 무심하게 돌아가는 소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소희가 속엣 비명을 지른다. 무엇 때문인가.

  등이 없다. 돌아드는 길목에서 무심코 눈을 들어 앞을 보던 소희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도도록하게 솟아 있던 가슴패기였다. 뼈마디 가지런히 열 개의 구멍으로 열 가닥의 실을 머금어 뽑아내는 고무대, 사람의 형상으로 서 있다. 그런데 그것에게 등이 없다. 반쪽으로 잘린 대나무는 아주 오랜 시간 등을 잃어버린 채 바람에게 시달려온 것이다. 메마른 가슴은 뽀얗던 속살을 하나씩 차례로 잃어갔을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 명명하지 못한 하나의 결은 무리를 이루어 두둥실 어디론가 흩날려 갔을 것이다. 토방 밑 틈에 붙잡히고 토담 덮은 용마름에 붙잡혀 피어나던 민들레도 이제는 홀씨 되어 날아가는 계절, 고무대 속 잃은 사람은 오늘도 등을 잃은 자신을 모른다. 무심코 손을 등으로 가져가 뻗어 올려본다. 어쩐지 가려움이 이는 곳 아래쯤에서 저고리 도련 잎이 잡힌다. 숨을 내쉰다. 등이 시리다.

  등,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인가. 한사코 앞을 향해 가는 가슴은 뒤를 보고 가는 등이 돛인 것을 모른다. 옥은 치(키)를 가진 배에 쟁미 노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종종 잊는다. 벗치, 쟁미 노는 배가 나아갈 길을 트는 것을 종종 잊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 한가운데에서 노를 젓지 않아도 배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돛이 바람을 구슬리며 흘러가게 하는 수고로움인 것을 종종 잊고 살아간다. 앞을 향하는 가슴은 어쩌면 뒤를 보는 가슴, 등의 속 깊은 정을 아예 모르는지도 모른다. 눈물이 한 움큼 밀려드는 마당, 그곳에는 소희의 버팀목이 없다. 시린 등을 기대고 비빌 나무, 소희의 등나무, 도영, 그가 없다. 

  다시, 길을 걷는다. 뜨거운 햇살이 밋밋해지는 오후, 실은 개쇠, 참쇠, 막쇠의 자리로 돌아오고, 고무대 앞에서 열 가닥의 실은 너울춤을 추며 소희의 엄지손가락에 감긴다. 훠이 훠이 새를 쫓는 모양으로 너울춤을 추던 실은 막쇠를 감고 돌아 참쇠에 걸리고, 개쇠를 감고 돌아 중간쇠를 향해 길을 간다. 멀고 먼 길, 열 자의 길, 네 바퀴를 돌아 팔십 올로 감기는 길, 그 길을 열다섯 번 도는 여자, 사십 자 한 필의 길은 등이 없는 여자의 등 찾아가는 길을 하루씩 쪼아 먹는다.   

  

  달빛 속에서 책을 읽던 그림자가 일어선다. 합죽선의 살을 모아 쥐고 일어서더니 오른발을 물리고 왼발을 물리고 도포자락을 바닥에 끌며 뒤로 물러선다. 부채를 든 손을 뻗어 머리 위로 올리고는 코가 위로 솟은 버선발 서너 걸음을 뒤로 물린다. 소희가 일어서려 한다. 붙잡고 싶다. 낯설지 않은, 그리움 저편에서 온 그림자 서생을 낯설지 않은 눈빛으로 쫒으며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마음뿐, 몸은 움직여주지 않고, 그림자 서생이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면 어찌한단 말인가 조바심을 치며 바라본다. 마음은 가지 마라 불러 세우지만 몸은 마음과 이미 둘이다. 

  도포자락을 흩뿌렸다가 부채 끝으로 잡아 올리며 빙글 돌더니 등을 보이고 선다. 이대로 가버리면 홀로 남겨지는 밤은 얼마나 무안할꼬. 자꾸 붙잡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뿐, 낯설지 않은 얼굴의 차림이어도 엄연히 이곳은 청상의 수절하는 방이거늘……. '나는 모른다.' 소희의 심장이 부끄러움 속에서 붉어진다. 그림자 서생이 두 팔을 쫙 펼치고는 나비의 몸짓으로 맴을 돈다. 도포의 긴 소맷자락은 나비의 날개인 양 하늘거리고 그 날개 속에서 저고리 소매의 끝동은 연지빛 햇물로 돋는다. 날개를 접은 나비는 다시 날고 부채는 먼 허공 한 곳에 점을 찍는다. 어이하리. 점으로 찍힌 그 별이 그림자 서생의 지향점이라면 정처 없는 길이라도 홀연히 떠나는 나그네의 심사로 걸어가지 않겠는가. 부질없는 미련만 남기려는 저 서생의 그림자가 명치끝에 묶은 자주색 술띠를 흩뿌리고 은회색 옥노리개의 수술을 물결치게 한다. 그곳에 합죽선의 살들이 새의 소리로 퍼진다. 달빛을 받아 검은 빛깔 오련하게 돋아나는 갓의 둥근 테 위로 두둥실 솟아 날개를 편다. 서생의 팔이 그것을 안고 도는데 누구의 솜씨인가. 푸른 잎사귀 먹빛으로 넝쿨지게 그려낸 난초, 그것의 꽃모가지가 불쑥 솟아 진분홍 곱게 물린 노란 꽃잎을 먹빛으로 그려낸 화공, 그에게서 천년바위의 모성은 숨겨진 먹빛이라. 안고 도는 서생의 팔 위에서 어깨 위에서 차라리 수줍은 꽃잎이라면 즈믄 해가 또 즈믄 해를 살아도 삶은 온유하리라. 파도가 밀려오듯 달음질로 오는 서생, 그의 부채가 접혀지고…… 음악은 멈춘다. 술대를 내리치고 비켜 올리며 줄을 퉁기는 거문고의 느린 음조와 장구의 숨죽인 소리가 느리게 울려오던 밤이 이제는 썰물 들어 빠지려 한다. 서생의 춤은 난새의 춤이 되어 거울 속으로 들어가니 칠흑같이 검던 밤이 안갯속에서 희뿌옇게 밝아온다. 달구 놈이 울어 돌아가는 밤, 그림자 서생이 달빛 속으로 걸어간다. 원망의 하소가 혀끝에 머문다. 어느 밤에 다시 오시려오.      


대문사진: 동박새(Daum카페, '최화식의 사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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