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떠나온 자리, 꿈꾸는 다락
“여보게 정읍네, 어찌 많이 쉬었는가? 자네들 오늘 하루가 참 더디게 흘러가고 아직 멀었는디. 이제 슬슬 시작해보면 안되겠는가? 근질근질하네. 입춘도 얼른 붙여보고 억만 노적도 얼른 쌓아주고 싶네만.”
“우리가 이곳에 올 때 길이 험했다네. 우리 목숨이 명부전에 달렸으니 명부전에서 하시는 대로 하다 보니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네. 아직도 그 업칭(業秤)에 얹힌 죄가 덜어지지 않는 고통에 시달리던 중이었네만, 어떻게 우리를 잊지 않고 불러주었는가, 뼈마디에 맺히도록 기쁘고 고마웠네. 혈족으로 맺은 인연의 권속들이 불러주면 이승의 밥 얻어먹고, 쑥물에 향물에 정화수에 몸을 씻으면 몸에 붙은 더러운 때들이 씻겨나가니 개운하고, 죄의 찌꺼기들이 덜어지니, 업칭에 얹힌 죄의 무게도 줄어들지 않겠는가. 그리고 새로 마련한 깨끗한 옷을 입고 명부전에 가면 그나마 지옥의 형벌이 낮아지리니, 주저 않고 나왔다네.”
“여보게 정읍네, 그렇다고는 히도 빈손이 부끄러웠네. 이루어 놓은 것 없이 물려준 것이라고는 남루한 집에 양식도 없이 매끼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 병이 들어도 약 한 첩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고 마는, 기막히게 지독한 가난만을 남겨놓고 떠나왔는데……가시자고 청하는, 오시자고 청하는 권속들 앞에 낯을 들 수가 있어야지 말이네. 염치가 없으니 낯이 화끈거리는디, 전화위복이라던가. 오는 길에 배가 뒤집어질 뻔 했는디, 어찌어찌해서 술비 잡는 노래를 했다네. 그 유명한 영광굴비라는 것이 내나 히야 진도 사람들, 조도 사람들 배타고 나가서 잡아오던 조구 아닌가? 절 받는 고기라고 일미 중의 일미라고 임금님께 진상되던 고긴디 말이여, 고걸 그 배에 타고 있던 망자들이 다들 합심히갖고 잡아 올리지 않았겄는가. 그러니 그것들을 빨리 풀어버리고 싶네만.”
쾌자를 입고 연꽃 모자를 쓴 소희가 손에 정종을 들고 굿마당으로 나온다. 저고리 섶을 가만히 누르고 옷고름을 손으로 매만져 가다듬고는 절을 한다. 두 손을 위로 한껏 들어 올려 합장을 하고는 다소곳한 표정으로 절을 한다. 가만가만 조용한 음성으로 어서 굿을 시작하자고 말을 하던 신·구 조상들이 제석님들을 받들고는 쌓아놓은 노적을 하나씩 내어놓는다. 하나도 남김없이 자손들에게 풀어놓고 갈 모양이다. 흐뭇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눈물을 머금기도 하면서 술렁이기 시작한다.
모씨 집안의 선영조상 잔치 야락 잔치가 있다 허여 염불차 왔는디
명이 짧은 자손들은 명줄도 이어주고
복이 없는 자손들은 복줄도 태워주시고
명일랑 주시거든 삼천갑자 동방삭의 아흔 진명을 주시옵고
복일랑 주시거든 석숭의 복을 빌어 천복 만복을 주옵소서.
몸이 아픈 자손들은 한산초 불사약 선약 단약도 주시고
인간풍파 입담괴담 관제구설 삼제팔란 액운액살을 소멸하고
부부갈등 부모 형제 자식 간에도 갈등 날 일 없이 잘 풀어서 받들어 주시라고
지극정성 드리오는디~~
이 중이 여기 왔으니 그냥 갈 것이요
이승염불 관세음보살 저승염불 나무아미타불
둘러앉은 조상들과 제석님들 상 앞에 나아가 축원하던 소희가 원왕생 원왕생 극락가자고 세세원정을 가시자고 성주 터전을 닦으며 나선다.
아아 아아아 어기야 청청 지경을 닦아나보세~~
일세동방 주추 밑에 청룡 한 쌍이 묻혔으니
용의 머리가 다치지나 않게 살금살금 닦아나보세
아아 아아아 어기야 청청 지경을 닦아나보세~~
이세남방 주추 밑에 적룡 한 쌍이 묻혔으니
용의 머리가 다치지나 않게 살금살금 닦아나보세
아아 아아아 어기야 청청 지경을 닦아나보세~~
삼세서방 주추 밑에 백룡 한 쌍이 묻혔으니
이 머리가 다치지나 않게 살금살금 닦아나보세
아아 아아아 어기야 청청 지경을 닦아나보세~~
사세북방 주추 밑에 흑룡 한 쌍이 묻혔으니
용이 머리가 다치지나 않게 살금살금 닦아나보세
아아 아아아 어기야 청청 지경을 닦아나보세~~
마당에 깔아놓은 덕석 위에 앉아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익숙한 음에 쉬운 가락이라 그저 유행가를 부르듯이 따라 부른다. 굿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루하루 굶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것만으로도 복이 많은 삶이라 덕담을 들을 삶들이기에 일부러 돈을 헐어내고 곡식들을 헐어내어 굿을 하는 것은 만만치 않을 일이다. 그런데도 이렇듯이 기억에도 없는, 때로는 일면식도 없는 조상들을 들먹여가며 굿잔치를 연다는 것은 그만큼 절실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허리가 아프다고 드러누워 병치레를 하게 된다는 사연도 어지간해야 하는 것이고, 부부간에 공방이 들어 사네마네 하는 실랑이가 지속되어 가정이 파탄이 날 지경이 되어야 겨우 생각해보는 것이다. 괜스레 남의 싸움에 말려들어가 덤터기를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거나 해야 겨우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굿이다. 웬만해서는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에게 자잘한 문제들이 거듭되고, 건강에 문제가 발생하고 급기야 병원신세를 짓게 되니, 멀리 떨어져 한 번 오가기도 쉽지 않은 부모의 마음은 날마다 졸아붙는 조청 같은 것이다.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걱정 근심거리들이 하루가 지나면 그만큼의 더께를 더해 굳은살이 되고 마는 것을 이겨낸다는 것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내가 아프고 말 일이지, 내가 겪고 말 일이지, 결국은 빚을 내고 마는 것이다. 가실하게 되면 얼마간의 이자를 더해 갚을 것이니 라는 말을 붙여 애걸을 하는 것이다. 고봉으로 채워야 할 밥그릇의 숫자가 얼추 머릿속에 떠오르고, 떡쌀도 말가웃이나 되게 앉혀야 할 것이고, 바닷고기 육고기에 술이라도 빚어내자면……과일은 제일 크고 빛깔 좋은 것이라야 하지 않는가. 구색을 갖추어 차리는 굿상은 웬만한 잔칫상에 버금가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어이, 정읍네, 우리 어서 입춘 한 번 붙여보세. 입춘을 붙여야 봄바람 불어서 꽝꽝 얼었던 땅이 몸을 풀고,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천동(天冬) 지동(地冬)에 맥을 못 추던 개울가 버들개지도 눈을 뜰게 아닌가. 부들부들 솜털 날리면서 봄노래 불러야 숨어 자던 물고기 놈들도 눈을 뜨고 나와 살랑거릴게 아닌가. 내 본시 성정이 급하던 놈이라 제 성질 어디 못주고 부글부글 들썩들썩 오두방정이니……자네 허는 양을 보고 있자니 목이 타네. 두름박에 물 가득 퍼담아 꿀꺽꿀꺽 들이붓고 싶은 심정이구먼.”
“그렇다고 자네부터라고 못 박지는 마시게. 자네 성정이 급하다고 나만큼일라고. 급한 성정에 액이 붙어놓으니 성가시게 일도 많이 저질러 저승 염라국에 들어서 49일 맞기까지 겪은 고초가 얼마이고, 업에 따라 받은 죄가 얼마든가. 받은 죄를 다시 닦아내고 씻어내고, 그리고도 모자라 또다시 불려가서 겪은 수모가 골수에 맺혔는데, 오늘은 이렇게 선영조상 제석거리에 앉았으니……만감이 교차하네만은, 안겨주고 잪은 마음에는 나도 질 수가 없으니 말이네.”
“순서를 정해서 함께 붙입시다. 시간도 많지 않은 차에 다투느라 일 놓치지 말고 버리덕이 공주님 아홉 아들 순서대로 달려들어 죄를 씻어내며 붙여보고 쌓아봅시다. 진광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전 순서로 발려가며 경계를 주면서 십제전의 전륜대왕까지 달아봅시다. 어떻소? 그리합시다. 시간이 적소.”
입춘을 붙이노라 입춘을 붙여보세~~~
“제일전 진광대왕전에 가고 보니
그곳은 죽은 자가 7일째 되는 날에 방문하는 명부전이라. 생전의 선행을 사경대(邪鏡臺)에 비추어 조사하는데, 그 모습이 참혹하여 볼 수가 없다. 무슨 죄가 그리도 많았던가. 알고 지은 죄도 쌓이다 보면 그것이 죄라는 사실조차 잊게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익숙해지게 되니, 죄는 양팔 저울에 그득히 쌓이게 되고, 그것은 곧 태산같이 쌓였으되 우둔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미 감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선한 사람이라고 선하게 살았노라 크게 웃으며 덕을 치하하고 공을 높이 사며 자화자찬에 빠진 삶을 살았으니, 나는 죽었으되 어디로 갈 것인가. 천상이든 지옥이든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겠으나 그곳은 이미 지옥이다. 이 세상 누구도 모르지만 나 자신은 결코 모를 수 없는 그것, 본질을 밝혀서 넓게 나눈다는 진광전은 도산지옥이라, 끼이익 까아악 크애애 퀴퀴퀴 크크큭 괴괴한 옥졸귀, 식인귀들의 울음도 아닌 웃음도 아닌 소리들에 물어뜯기고 쇠망치로 두들겨 맞으며 칼날같이 뾰족한 바위산을 오르는 고통, 죽었다 살아나고 다시 죽었다 살아나는 수백 번 수천 번의 고통, 그것은 죄악의 대가라.
후손들에게 이르노니, 죄를 짓지 마라. 나의 후손들아, 죄라고 이름이 붙기 전에 너의 마음에 불길처럼 일어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살피고, 옳고 그름을 생각하면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니, 현명하고 명석한 나의 후손들아, 경계하노라. 가장 먼저 너의 마음을 살피는데 정성을 기울이거라. 죄는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정확하게 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모든 죄의 씨앗은 너의 마음이 주머니이니라.”
상보에 붙인 입춘 응천상지삼광이요 비인간지오복이라
둥드러시 붙여보세~~~
“하늘이 응감하여 그 은혜가 강물 되어 흐르고 땅 속으로 스미니 인간의 모든 바람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 등 따숩고 배부르면 그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오늘 간절한 심정으로 가정의 안위를 걱정하는 후손들을 위해 억만 장 기와불사로 지어진 대 명당 좋은 터에 용의 머리가 다치지나 않게 대들보에 입춘 노적을 붙였으니, 부디 평온하고 온건하여라.”
입춘을 붙이노라 입춘을 붙여보세~~~
“제 이전은 초강대왕 전이라 버리덕이 공주님의 둘째아드님이시라,
죽은 지 14일째 되어 가게 되는 화탕지옥이다. 이곳을 관장하는 대왕은 거짓으로 중매를 서고, 거짓된 물건을 팔아 이득을 챙긴 자, 사람이나 동물을 헤쳐서 불구로 만든 자들을 심판하고 벌을 준다. 오구시왕의 덕을 입어 명부의 두 번째를 관장하게 되었으니 어찌 인정이 없겠느냐? 어떻게든 망자의 죄를 덜어보려 하겠으나, 마지막 입고 온 옷에 그 죄악의 냄새가 모두 실려 의령수(衣領樹) 저울의 눈금에 새겨지니, 그 무거운 죄를 어찌 감출 수 있겠느냐. 낱낱이 드러나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갈 곳이 정해지고 만다.
어깨에 몽둥이를 메고 손에는 작살을 들고 길을 재촉하는 우두옥졸(소의 머리를 한 옥졸)을 따라 삼도천을 건너온 후 맨 위에 있는 나루를 걷게 되면, 그 길은 꽃길이다. 나루터의 물이 얕아서 건너는 동안 발목만을 찰방찰방 적시는 것 정도이니, 물 저편에서 날리는 꽃잎이 없다 하여도 그 길은 꽃길이다. 만약에 옷의 무게를 다는 의령수에 눈금이 잡히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 가운데 나루터의 금·은·칠보로 된 다리 위를 건너게 될 것인데, 그것은 터럭만큼의 죄도 짓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어찌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이승에서의 옷이 곤룡포였다고 될 것이며 명주 비단에 보석 장신구로 치장하였다 하여 될 것인가. 욕망의 춤사위에 흐트러진 정신으로 살아온 이승의 값진 인생은 명부전 초강대왕 전에서는 오히려 악인만이 건너게 될 아랫나루에 닿게 될 것이니, 그것은 탐진치로 썩어 물든 더러운 악취가 입고 온 옷에서 풍기기 때문이리라.
나의 후손들아, 물살이 화살처럼 빠르고 물결은 높이 치솟는 파도 속에 숨어 있는 독사에게 먹히는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다. 쏜살같이 빠르게 흐르는 세월이라 말하는 우리는 백 살을 살 수 없는 생의 길이를 짧다 하고, 인생의 덧없음을 말한다. 덧없는 그 인생의 허망함 뒤에 숨겨진 나의 생은 면경처럼 깨끗하고 말끔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스스로를 치하하지만 죽으면 되살아나고 죽으면 되살아나서 내리치는 돌덩이에 으깨어지고 귀왕과 야차가 쏘는 활에 맞는 일곱 낮 일곱 밤은 쏜살같이 흐르지 않으며 덧없는 허망이 결코 아닐 것이니, 오늘 나를 부른 후손아, 잊지 말아라. 의령수 눈금의 경계를 잊지 말아라.”
중기둥에 붙인 입춘 화기자생 군자택
둥드러시 붙여보세~~~
“고대광실 좋은 집에 금은보화 둘러놓고 온갖 아름다운 꽃향기 속에 살았어도 공수래공수거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마지막 입고 온 옷가지에 묻은 냄새가 시궁창에 썩어가는 냄새만큼이나 더럽다면 삼도천 흐르는 물살은 시위를 떠난 화살보다 빠르게 흐르며 귀왕과 야차에게 으깨어질 것이니, 소리를 질러도 악을 써도 두고 온 가족들은 듣지 못할 것이니,
어여쁜 나의 후손들아, 거짓을 섬기지 마라. 아홉 개 가진 것 중에 한 개를 마저 채워 열을 세고 싶어서 하는 거짓은 남을 속이고, 남의 것을 가로채는 것이니, 애써 채운 아홉도 뜯어놓고 보면 칠 할이 남의 것일 수 있을 테니, 욕심이 죄라 생각하고 보태려 애쓰지 마라. 다만 땀 흘려 일하고 거두어들인 것을 아껴 먹는 것이 남는 것일 테다. 결코 쉽지 않은 당부인 것을 안다마는 화기자생 군자택이라는 입춘맞이 첩(帖)의 글귀도 양심을 속이지 않고 분수를 지키며 사는 사람의 집을 일컬음일 것이다. 봄빛도 다투어 들어오는 화평한 집의 대문에는 거짓이 들어설 수 없을 것이다.”
입춘을 붙이노라 입춘을 붙여보세~~~
“제 삼전은 송제대왕 전이라 버리덕이 공주님의 셋째아드님 전이다.
죽은 지 21일째 되는 날에 가는 곳이 한빙지옥이다. 부정한 관리로서 남을 속여 이익을 챙기거나 배신을 하고, 중상모략으로 남을 곤경에 빠뜨린 자가 가는 곳이다. 도산지옥을 지나고, 화탕지옥을 지났는데도 이곳 한빙지옥에까지 오다니……,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의 혀, 시기하는 마음과 불길처럼 일어나는 질투로 물든 가슴이 내뱉는 음해의 말들과 빚어낸 행위들로 지은 죄를 심판받는 지옥이다.
세 사람이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마음으로 헤어졌는데, 하루 이틀 뒤부터 어쩐지 싸늘해진 표정과 어쩐지 외면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사람은 정신이 산란해지기 시작한다. 나보다 하나 더 가진 것이, 또는 나보다 가진 것이 적고 별반 다른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어쩐지 나보다 잘나게 보이고 좋아 보일 때 은근히 샘이 나고 부러운 것,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떠난다. 그것은 곧 귀신의 마음으로 총총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도사리고 있는 마음이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인지를 짐작하지 못한다.
나의 후손들아, 그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갔다. 불에 데워지고, 인두에 지져진 몸이 다시 찢기고, 죽은 몸이 한길에 버려져서 수습조차 할 수 없게 하는 벌을 받으며 사자를 따라 저승으로 갔다. 그 죽은 몸의 가족들은 지독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귀양을 가고, 세상 사람들의 온갖 비아냥과 손가락질을 받는 수모를 겪으며 살다가 생을 마쳤다. 얼마나 많은 분노와 원망이 그들의 골수에 맺혔겠느냐? 이 모든 죄악이 무엇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이 죄업을 일구어낸 자들의 가슴은 얼마나 뜨겁게 타올랐겠느냐? 모든 것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욕심은 시샘하는 마음, 질투의 언어들이 심장을 타고 올라 혀끝으로 뱉어진 것일 텐데, 그것은 결국 살인죄다. 미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미워하게 되고, 증오하지 않아도 될 것을 증오하게 되었으니 이승의 그 뜨거운 것들을 차갑게, 시리게 만들어주는 곳, 한빙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괜찮겠지 싶은 마음으로 그곳에 가면 그 업관 앞에서 머리에 뿔이 열여섯 개나 솟아 있고, 낯바닥에는 열두 개의 눈을 가진 도깨비를 만나게 될 것이다. 번개 같은 빛을 뿜어내는 눈과 불꽃을 뿜어내는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함을 들으면 송제대왕의 심판까지 가기도 전에 넋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니 오늘 나는 쑥떡같이 예쁘고 보드라운 나의 후손들에게 세뱃돈을 주는 덕담으로 입춘첩을 붙이련다.”
방문 앞에 붙인 입춘 입춘대길 건양다경
둥드러시 붙여보세~~~
“설이 지나지 않은 겨울, 매화는 그윽한 향기를 온 세상에 퍼트릴 양으로 야무지게 꽃망울을 머금고 수줍어하지만 사람들의 마을은 아직 겨울이라. 그러나 해는 길어지고 볕은 따사로워지니 기지개를 켜고 방문 밖으로 나오고 싶은 때가 또한 이때라. 봄의 기운이 동트기 시작하는 계절의 분주함 속에서 나는 너희들의 방문 앞에 입춘대길 건양다경의 격문을 여덟팔자의 모양으로 붙여놓으리니,
쑥떡같이 예쁘고 보드라운 나의 후손들아, 부디 온화한 훈풍에 몸을 맡기고 꽃향기에 취하듯 너희들의 마음에 시샘하는 마음, 질투의 말을 담지 말아라. 남의 떡을 더 크게 보는 마음으로 남의 덕을 더 크게 보고, 남의 흠을 보는 눈길로 너 자신의 흠을 둘러보아 두 손으로 탈탈 털어내도록 하여라. 마음에 드는 봄기운은 너의 심장이 흙이니, 그곳에 오곡(五穀)의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어라. 그것들이 움쑥움쑥 돋아나는 계절 속에서 입춘대길 건양다경의 뜻을 새기고 보면 초심(初心)은 춘심(春心)이라. 춘심은 모성(母性)이리니. 생명을 키우고 살찌우는 덕성이 만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그것이 너희의 방문 앞에 붙어 있다.”
입춘을 붙이노라 입춘을 붙여보세~~~
“제 사전은 오관대왕 전으로 버리덕이 공주님의 넷째아드님 전이다.
죽은 지 28일째 되는 날에 가는 검수지옥이다. 송제대왕 전에서 이미 심판을 받고 죗값을 치르고도 죄는 덜어지지 않아 가게 되는 곳이 오관대왕 전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면 그것이 업이 되어 층층이 쌓였단 말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강이다. 말로는 오백 리가 넘는다는 곳에 온갖 것들이 모여들어 썩어가면서 풍기는 악취가 진동하여 정신을 바로잡을 수가 없고, 시커먼 물이 펄펄 끓는 열탕에 누구라서 들어갈 엄두를 낸단 말인가. 그러나 악귀들은 가만 두지 않는다. 그곳의 악귀들에게 자비(慈悲)는 없다. 쇠톱 같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밀어 넣고, 쇠톱 같은 물고기와 독충 같은 물고기들을 불러내어 망자들에게 고통을 주게 만든다. 강을 건너는 동안 망자는 골백번을 다시 죽고 다시 살아난다.
그렇게 강을 건너 오관대왕 앞에 이르면 커다란 저울에 얹히게 된다. 그것을 업칭(業秤)이라 하는데, 삼백 자 정도의 바위가 놓여 있는 반대편에 얹히게 될 때면 대부분의 망자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희망을 갖는다. 아무려면 내가 지은 죄가 저 태산 같은 바위보다 무거울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잠시 동안의 희망, 잠시 동안의 소망, 끈이 없는 추락……그것은 나락.
되짚어보면, 강을 벗어나서 걷는 동안 숲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소나무 숲 향기를 떠올렸다. 편백나무 숲 향기도 떠올렸다. 이승에서 살던 시절, 땔감을 하러 숲에 들어가면 아무렇지도 않게 코끝을 후비고 들어와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던 향기, 무심코 걷는 길섶에서 미처 느끼지도 못했지만 머릿속 가득 들어차 있던 잡념들이 사라지며 말끔해지던 순간들……그 순간들이 업칭 앞에서 떠올라 후르르 떨며 품었던 희망,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비수였다. 그저 아무 곳에서나 보고 지나가는 나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 주면서도 값이 없던 수심(樹心)……지옥의 숲에서 만난 나무들은 모두 내가 전생에 뱉어낸 말들이었다.
망어(妄語) · 기어(綺語) · 양설(兩舌) · 악구(惡口)……, 교묘한 말로 포장을 하여 아닌 듯이 쿡쿡 찔러댄 말들을 우회적으로 뱉어내며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했다고 스스로 치하했던 말들은 상대방을 소리도 없이 아프게 했다. 화려한 수사로 환심을 사기 위해 뱉어낸 말들로 상대를 속이고 자신의 이득을 취했던 날들, 스스로 기뻤다. 자신의 수완이 더없이 대견했다. 그것은 스스로 죄가 아니었다. 어쩐지 괘씸한 이를 혼내주기 위해 싸움을 붙였던 말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하고, 서로가 원수처럼 싸우게 만들었던 말들, 싸움 구경은 나의 승리를 확신하게 하는 판이었다. 참으로 엄청난 죄를 아무 의심 없이 저질렀던 시간들, 그것이 숲속에서 보았던 빛깔 고운 꽃들이 숨긴 비수로 꽂혀왔고, 안심하고 걷다가 빠진 구덩이에선 대나무가 창이 되어 날아와 박혔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순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나의 후손들아, 돌아보아라. 며칠 몇날에 몇 개의 말로 사람들의 속을 쑤셨는지, 아름답게 포장한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속였는지, 얼마나 현학적인 말들로 신을 팔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고 스스로 타락의 길을 걸었는지, 돌아보고 살펴서 바른 길로 걸어가거라. 생의 순간순간마다 업칭을 생각하도록 하여라.”
말래문에 붙인 입춘 문영춘하 추동복 호납동서 남북재라
둥드러시 붙여보세~~~
“여리고 순하여 법 없이도 살아갈 내 후손들아, 강단을 기르도록 하여라. 크고 작은 잘못도 마음이 여린 데서 비롯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가운데 이리저리 휩쓸리다보면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네가 지은 죄가 아니어도 네가 뒤집어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강단지게 갈무리하도록 하여라. 마음이 여리어 결단이 어려운 것은 실력이 없음에서 비롯되고, 가진 것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구차함의 일면이니, 나는 오늘 너희들이 사는 집 문문마다에 춘하추동 복이 들고 동서남북 흩어진 재물이 차곡차곡 들어와 쌓이는 기틀을 마련해 줄 것이다. 근면하고 성실함은 재물을 모으는 근본이요, 검소하고 소박함은 쌓인 재물을 흩어지지 않게 지켜내는 근본이니, 실력을 쌓는 일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요,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도 네 설 자리에서 당당하리라.
다만 인색함은 멀리 하여라.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의 마음을 사지 못하면 저잣거리에 욕과 흉이 쌓일 것이고, 지나가는 등 뒤에서 눈 흘기는 이가 많을 것이니, 재물이 없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의 입이 뱉는 침이다.
순하고 착한 내 후손들아, 네가 가진 것들 중 작은 것 하나라도 선한 마음으로 내어주고, 후하게 베풀면 그것은 곧 곳간의 재물보다 더 귀한 보물일 것이니, 그것이 덕망이다. 후덕한 너희들의 덕성과 덕망은 목숨이 다한 후 일곱 낮 일곱 밤의 순례에서 사방을 비추는 거울을 통해 낱낱이 보게 될 것이니, 오관대왕전의 업칭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입춘을 붙이노라 입춘을 붙여보세~~~
“그러고 보니, 모든 죄는 끝없이 솟아나는 욕심과 그것들을 뱉어내는 혀와 그것들을 행하는 손과 발이 빚어내는 조화 같은 것이로구나. 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깨우치게 할 수 있는 제석의 반열에서 나의 후손들에게 왔건만, 이 자리에서 버리덕이 공주님의 다섯 번째 아드님이신 염라대왕의 ‘도대체 얼마나 일깨우고 고통을 주어야 다시 죄를 짓지 않겠느냐고…….’‘얼마나 많은 윤회의 강을 건너보아야 비로소 참 정진을 할 것이냐고……’ 애가 닳게 외치던 음성, 그 분노의 뜻을 이제야 알겠노라. 침이 마르도록 일깨우고 또 일깨워 주어도 돌아서면 다시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씻고 씻어 제석의 반열에 갔음에도 다시 깨우치게 되는 것은 여차하는 순간 나 역시 죄를 짓게 될 수 있음이리니,
어제도 애써 일하고 오늘도 애써 일한 나의 자손들아, 고생 많았던 오늘이 가기 전에 수고로이 일한 너희들의 손과 발을 깨끗이 씻어주고, 조용한 곳에 홀로 앉아 되돌아보아라. 하루 종일 네가 누군가를 향해 뱉어낸 말들과 네가 행한 손짓과 발짓이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지 않았는지 돌아보고, 그 상처를 향해 사과의 말을 뱉도록 하여라. 처음엔 어려울 것이다. 너희들이 가진 밑바닥의 마음이 합의해 주기까지 많은 시일이 걸리고 많은 충돌이 일 것이다. 때론 억울할 것이고 때론 화가 나서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시작이 어려운 만큼 나중은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향해 독설을 퍼붓던 이들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웃음이 피어날 것이다. 염라대왕전까지 가서 혀가 뽑히고 안반처럼 넓게 펼쳐져 두드림을 당하지 않아도 오관대왕, 송제대왕 전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받지 않고도 금과 은과 칠보로 된 다리를 건너 윤회의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무엇으로 태어나든 순탄하고 무탈할 것이다.”
정재문에 붙인 입춘 비기옥기 장생수요 노비홍산 불로초라
둥드러시 붙여보세~~~
“버리덕이 공주님의 여섯째 아드님이신 변성대왕전 앞에서 이승의 가족과 후손들이 이미 죽은 너희들을 위해 음식을 차려놓고 빌어서 죄를 탕감시켜 주기를 바라고 소원하지 않아도 너희들 스스로가 죄 없이 깨끗한 영혼으로 환생할 것이다. 더러는 윤회의 고(苦)를 겪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열반의 세계에 들기도 할 것이다. 부디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 영혼에 때가 묻지 않도록 노력하여라. 정재문에 붙인 입춘첩만 보아도 너희들은 사는 동안 험한 병에 들지 않고 타고난 복대로 명대로 살고지고 할 것이다. 그러니 부디 옷가지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듯, 얼굴에 묻은 때를 씻어내듯, 헛된 욕심에 사로잡혀 함부로 내뱉은 혀를 소금물로 씻어내고, 손과 발을 씻어내는 수고로움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업경(業鏡)과 업칭(業秤)에 걸림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라.”
방앗간에 붙인 입춘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의 조작방아
둥드러시 붙여놓고
대문 앞에 붙인 입춘 개문 안에 만복래요 소지하니 황금출이라
둥드러시 붙여보세~~
입춘을 붙였으니 노적이나 끌어보세~~ 허리 굽혀 절을 하며 웃음 머금는 소희 곁으로 선영조상들 모두 나와 원을 그린다. 까만 먹물 먹여가며 줄줄이 써나간 이름 옆에 살았을 적 무엇을 이루었노라 적어놓았을 만큼의 집안도 못되거니와, 어느 벼슬에 나랏밥을 먹었노라 적어 놓을 만큼의 풍신도 못되는 조상이고 후손들이고 보니, 항렬을 가려내고 맞출 여념도 없다. 그런 권속들이 옆에 선 얼굴을 보고는 흥에 취해 손을 맞잡는다. 덧대어 깔아놓은 맷방석의 가장자리를 밟고 서며 둥글게 둥글게 돌아간다. 사돈네 팔촌까지 모여든 잔칫상이다. 석구네의 머리굿이 불러낸 신조상들이 새 옷을 때때옷처럼 갈아입고 소희가 씻김 마당에서 불러낸 구조상들 사이에 서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자정이 기웃대는 밤, 하나의 핏줄로 이어진 혼령들이 저희들 잔치마냥 몰려와서 저희들 재수굿처럼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묻혀가려는 이웃 사람들의 마구잡이 춤과 어우러지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더운 숨을 쉬는 산 사람들이야 알까 모를까 얼음장 깨어진 돌 밑에 파르라니 고인 이끼처럼 차가운 숨을 쉬는 혼령들이 소희의 노적 끌어들이는 소리를 따라 맷방석 가장자리를 돌며 신명을 돋운다.
어허 어허 어허어어야 안아들이자 노적이로구나~~
강원도라 금강산의 큰 법당 노적아
아무데도 가지 말고 모씨 댁으로만 오소서
어허 어허 어허어어야 안아끄서들이자 노적이로구나~~
옥주골이라 지추달락 억만장에 팔만노적 팔만장에 억만노적
아무데도 가지 말고 모씨 댁으로만 오소서
어허 어허 어허어어야 안아끄서들이자 노적이로구나~~
진계명계 너른 노적 곡수 받어서 다 들어오고
각처각지 갑부노적 아무데도 가지 말고 모씨 댁으로만 오소서
어허 어허 어허어어야 안아끄서들이자 노적이로구나~~
그 노적을 안어다가 이름 석자 날리시고
넓고 넓은 땅도 사서 부자장자 되어보세
어허 어허 어허어어야 안아들이자 노적이로구나~~
쟁그랑 쟁쟁 물고기 지느러미 추를 달아 울리던 정종이 소희의 손에 이끌려 팔만노적 억만노적을 끌어다가 무사태평 소원성취 · 운수대통 소원성취 · 만사형통 소원성취를 갈구하는 후손들의 이름이 적힌 축원장에 부어준다.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물을 길어 올리는 어느 아낙의 이른 아침이 소희의 손에 이끌려 굿상에 부어진다. 김제만경 너른 들판에 황금물결 이루는 가을이 통째로 실려서 바람타고 흔들리는 등불 밝은 굿마당으로 부어진다. 돌아오는 추석에는 송편 예쁘게 빚어서 둘러앉아 먹으라고 큰 됫박 작은 됫박에 가득 담아 계수나무 절구통에 부어준다.
“자손나리 이리 오시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합수 받어서 노적을 많이 많이 쌓아 주신답니다. 저기 신장님들, 오방신장님들 문 열어달라고 돈 좀 따악……노잣돈 좀 올려놓고 노적 받읍시다.”
“주신다는디 안 받을 수 있간디? 얼렁얼렁 돈 잠 올려놓고 재수 받으시요이.”
석구네가 끼어들어 재촉을 한다. 엄벙덤벙 노잣돈을 가지러 가는 며느리의 등을 바라보는 선영조상들의 표정이 흐뭇하다.
“아따 그 양반들 복도 많네에.”
구경꾼들 속에서 덕담이 흘러나온다. 아깝지 않게 퍼지는 덕담을 두고
“복도 많어. 참말로. 이때꺼징 굿 참 많이도 댕깄는디, 이렇게 굿 잘 받는 조상들은 첨 봐버맀네. 참말로 뭔 일인가 모리겄네.”
“이 집 조상님들이 놀기 좋아허고, 드시기 좋아허고 넘 퍼주기 좋아허시는 어르신들이라…….”
오방신장 앞에 문 열어달라고 비는 돈을 수북이 쌓아놓은 쌀 위에 얹어놓고 소희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며느리에게 조상님들 덕을 치하하고는 정종에 쌀을 퍼담아 며느리 그릇에 담아 준다.
받어가소 이 노적을 받어가소
천석궁 노적을 받어가소
만석궁 노적을 받아가소
재수바래 이 노적을 받아가면
나라에는 충신노적 부모에게는 효도노적
일가친척간에는 화목노적 형제간에는 우애노적
부부간에는 화합노적 동기간에는 우애노적
자손나리에게는 출세노적
먹을 입도 주고 가고 입을 옷도 주고 가고
쓰고 남고 먹고 남은 재물일랑 받어가소
이 노적을 받어가서 팔자자랑 시키고
자손나리 출세시키고 가족 모두 건강하여
천석궁 만석궁 부자장자 되시라고
이 노적을 받어가세~~~~~
모두가 제 것인 양 각자의 주머니에 주워 담는다. 푸짐하게 웃는 사람들의 밤이 새 날을 맞는다. 둥실 떠서 맷방석 가운데까지 차오른 달과 함께 빙글빙글 돌던 선영조상들도 홍조 띤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로 돌아간다.
초저녁잠이 많은 노인 한둘은 뒷짐을 지고 들어오며 “끝날라믄 아직 멀었는가?” 주변을 살펴보며 뒤뚱뒤뚱 앉을 자리를 찾고, “예 보시요, 인지리양반, 이리 와 앉으시기라. 예에.” 손을 까불러가며 자리를 터준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궁둥이가 다 닳아버린 무릎팍을 탓하며 꾹꾹 눌러댄다.
“그나저나 이런 사람은 쌓아주는 노적도 좋지마는……그리도 뭍이 나가 있는 자석들 아픈 디 없고, 돈벌러 댕기는 디 사고 같은 것이나 없으면 젤이지. 뭐 있당가.”
“그러기는 헌디……글도 먹고 살 걱정이 없어야 맘도 펜허고 몸도 펜허지라.”
“아믄 그라제. 돈이 많으먼 다소간에 뭐 아픈 디 있어도 뱅원 가믄 되고, 이 약 저 약 몸에 좋다는 거 사다 쟁이놓고 먹으먼 될 것인디 뭐, 그라고 저라고 헐 것 있간디? 그냥 돈 많으먼 장땡이여. 안 그런가들…….”
“아따따, 많이들 줏어 담었능갑다. 배부른 소리들이 늘어지능구마이…… 아함,”
입을 쩍 벌려 위로 들쳐 올리며 하품을 한다. 눈을 있는 대로 꽉 감으며 코허리에 주름을 뭉뚱그려 사린 노인이 눈물을 훔친다.
웅긋중긋 모여 앉은 사람들이 더러는 얼굴을 찡그려가며 웃고, 더러는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한숨을 구겨 넣으며 그냥 나오는 넋두리를 주고받는다.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인 근심거리들이 밤잠 잃은 사람들 눈꺼풀에 지그리고 조랑조랑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