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기다리는 여심, 환생
되야를 오소사 되야를 오소사 환생하야서 되야를 오소사
사람이 되야서 오실려거든 성현군자나 되야를 오소사
남자가 되야서 오실려거든 황후장삼이나 되야를 오시고
여자가 되야서 오실려거든 황후부인이나 되야를 오소사
돌아앉은 소희의 모습이 시리게 서럽다. 백동비녀는 전구의 빛에 감겨서 차갑게 물들고 가슴을 꽉 동여맨 치마 말기의 주름은 저고리 도련 밑에서 줄기 져 내린다. 하얀 물빛이 소희를 감싸고도는 밤, 한 가닥의 실이 뽑아져 나오며 감긴다.
구조상 받고 신조상 받은 음식상 아래 수북이 쌓여 있던 쌀은 며느리에게로 가고 그 자리에 시루 하나가 놓여 있다. 버리덕이 공주 오구시황님의 일곱째 따님으로 태어나 불문곡직 버려진 설움에 구멍 난 가슴, 다만 왕자가 아닌 공주라는 이유로 내다 버리라는 지엄하신 명(命)이 젖어든 시루, 소희는 그것을 마주하고 앉아 징을 두드린다. 동지섣달 눈밭 얼음 언 곳에 삼베옷 입혀 버린 아기공주, 오뉴월 찌는 더위에 동의(冬衣) 털옷을 입고 양지 뜨거운 햇발 아래 버려진 아기공주, 그 버리덕이의 공덕이 잡아당겨진다.
무엇하러 기원은 하였던가. 옥황상제께서 내리신 연꽃 한 송이 안고 내려온 천상선녀, 그 기품은 출천지 효녀, 하늘에서 내려온 한 마리의 학이 동지섣달 추운 날에 한 죽지 땅에 깔고 한 죽지로 옹위하여 보살피지 않았다면 죽어 없어졌을 생명이, 오뉴월 한더위에 계수나무 그늘 아래 한 죽지를 부채 삼아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죽어 없어졌을 생명이 무엇하러 오구시루 하나를 전장받았더란 말인가. 지옥 열 곳을 떠돌고도 버림받은 영혼들을 구원하겠다고 시루를 청했던 버리덕이 공주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삼천갑자 동방삭의 명줄로 석숭의 복을 빌어 줄로 잡아당기며 길어 올리는 정읍네 소희의 소리가 밤하늘을 울린다.
되야를 오소사 되야를 오소사
환생하야서 되야를 오소사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새가 되야서 오실랴거든 말 잘하는 앵무새나
춤 잘 추는 학두루미나 되야를 오소사
개가 되야서 오실려거든 청삽살이 홍삽살이도 내야 좋다마는
해도 물고 달도 물은 원앙개로나 되야를 오소사
꽃이 되야서 오실랴거든 환생초로나 되야를 오소사
말이 되야서 오실랴거든 백마 흑마로 되야를 오시고
소가 되야서 오실랴거든 황소로나 되야를 오시고
돌이 되야 오시려거든 망부석이나 되야를 오소사
나무가 되야 오실랴거든 장장목이나 되야를 오소서
신이로구나 어허어 어허어어 허어야 ~~~
에헤 에헤 허어어어어야 신이여 신이오~~
엎어놓은 시루 위에 시룻번을 붙였다. 잔치라도 있으면 떡쌀을 앉히고 김이 새어나가지 않게 둘러막던 시룻번을 종이로 붙이고 명주실을 둘러놓았다. 그 가운데 빈자리에는 쌀 담은 하얀 그릇에 초를 꽂아 밝히고는 멀찍이 앉아 징채의 손잡이에 실을 돌려 두드린다. 한 손으로는 실을 감는다. 두드릴 때마다 당겨져 나오는 실이 하얗게 감긴다. 누에의 집처럼 둥글게 말린다.
직녀의 하루, 멀고 먼 길,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실, 씨실. 직녀의 손에 이끌려 갈지자걸음을 걸으며 감긴 실은 북을 타고 날실의 강을 건널 것이다. 바디와 잉앗대 건너 날실의 틈으로 들어간 비경이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오고 가는 실, 직녀의 끌신을 따라 풀리고 감기는 날실을 감싸며 한 필의 명주를 만들었을 씨실이 지금 소희의 손에 이끌려오고 있다. 버리덕이 공주의 시루 위에서 망자들의 환생의 줄로, 후손들의 명줄과 복줄로 당겨지면서 감기고 있다. 학두루미가 되어 오든 원앙개가 되어 오든 망부석으로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인데, 그 환생초의 공덕도 소용에 닿지 않을 망부석은 어찌 염원하는가. 한 자리에 붙박여 걸을 수도 없으니 뛸 수도 없는, 결단코 소멸이 없는 망부석을 부르는 소희의 음성이 삼천갑자 동방삭의 명으로 감기고 있다. 한 번 떠난 사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 기다림은 미움이 되고 그리움은 병이 되어버린 착(着), 애증(愛憎)의 녹(綠)은 씻겨나갈 줄 모르는데, 백 년이고 천년이고 한 곳에 머물러 닳아질 수 없는 삶은…… 벌이로구나……. 미리내 넓은 강에도 까마귀 몰려와 까치의 어깨를 붙잡고 다리를 놓아 통울음 울게 하는데…… 소희 사는 집에는 다리가 없어 오지 못하는가. 열아홉, 그 여름, 누에의 몸은 길 없는 강에 다리를 놓았다.
기와지붕 처마 밑을 사정없이 밀치고 들어오는 아침 해가 신발을 신고 일어서는 소희의 눈동자를 정통으로 쏘아본다. 순간 멈칫하는 소희의 눈에 검은 상이 맺힌다. 검은 상은 다시 수십 가닥의 햇물로 퍼진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무(無)의 세계, 공(空)의 세계, 그 광활한 세계에서 소희는 막막함을 느낀다.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분별하려 애쓰고, 본래부터 내 것이 아닌 것을 소유하려 했던 지난날들에 짓눌려온 생애가 공허에 떠밀려 주저앉는다.
“아씨마님, 어찌 그런대요? 어지러우신가비요?”
비경이를 마당 가운데에 놓던 서운이가 깜짝 놀라 뛰어온다.
“아니, 아니, 괜찮다. 수선피우지 마라. 어른들 들으실라.”
서운이의 놀라는 소리가 거슬린다. 아주 사소한 소란일망정 중문 너머 큰방에 닿는 것이 면구스럽다. 자식 잃고 시시때때로 슬픈 눈물짓는 시어머니 최 씨의 가슴을 일렁이게 하고 싶지 않다. 너무도 가까운 곳에 너무도 멀리 있는 그림자 같은 사람의 일상이 눈에 띄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때때로 시어머니 최 씨는 반닫이 깊은 곳에서 명주베 보자기를 꺼내놓고는 한참이나 손으로 쓸어보며 눈물지었다. 자식이 생전에 입었던 옷을 싸놓은 보퉁이의 매듭을 풀지도 못한 채 흐느끼는 어미의 아픔을 누가 무엇으로 매만져주랴. 그저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눈길을 아래로 떨구고 앉은 청상의 며느리는 숨 쉬는 일상이 안타깝고 죄스러울 뿐인데…….
줄지어 얹은 기왓장 가지런한 담장을 타고 올라가는 호박잎 무성한 곳에 부지런한 아침이 햇살을 뿌린다. 오그라지며 담장 밑으로 처지는 누런 잎사귀들 사이로 노랗게 피어 돌돌 말린 꽃만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넓은 잎사귀 틈에 숨어서 자라던 기왓골 애호박 둥근 놈은 어제 새참 무렵 복흥댁의 억센 손아귀에 붙잡혀간 뒤로 솔잎 몇 줄기와 물오른 쑥갓 몇 줄기, 탱탱해진 고추 사이에 처박혀 노릇노릇하게 지져지고 말았다. 분주하게 오가는 젓가락에 붙잡혀 깨소금 툽툽하게 몰아넣고 통깨까지 푸지게 넣어 바특해진 간장 종지 안에서 뒤채다가는 서운이 입속으로 들어가고, 소희 입속으로 들어가고, 복흥댁 입 안으로 들어가 오물오물 씹히고 말았다. 비도 오지 않는 맑은 대낮 느닷없는 봉변이 아직도 서러운데 마당 이 끝에 들말을 놓고 저 끝에 끄싱개를 놓으며 중간에 비경이를 놓는 여자들의 분주한 발걸음을 꼭지 떼인 상처받은 자리만이 눈을 흘긴다.
서툰 손들이 마주 앉아 촘촘한 바딧살 사이로 실을 밀어 넣고 뽑아내어 천조가리로 묶던 시간들이 참으로 더디게 흘러갔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여름날 여자들의 등에는 땀이 차고 굽어지는 몸살들 사이에도 땀이 엉겨 들었다. 깨알만한 크기로 돋아나 따갑게 쏘아대던 땀띠들이 손마디 끝에 닿으면서 좁쌀만 한 크기로 도드라졌다. 따끔따끔 쏘아대는 그 자리에 붉은 멍울이 지는 동안에도 세 여자의 어제는 시나브로 흘러서 가고…….
고무대 서 있던 자리에 들말이 앉았다. 제비꼬리처럼 좌우로 갈라진 디딜방아의 모양새다. 넓게 벌리고 앉은 두 다리의 앞머리에 굵직한 기둥이 서고. 두 개의 다리를 싸잡은 몸체 위에는 너부데데한 돌이 묵직하게 눌러앉아 있다. 잘 깎아 놓은 실패 모양의 도투마리가 올려지고 내려앉는 동안 그 무게를 견뎌주어야만 한다. 들말에 앉은 복흥댁은 두 팔을 손잡이 위에 올려놓고 소희와 서운이의 손놀림을 지켜본다. 바디 끝에 참톱대를 끼우고 그 참톱대를 도투마리에 묶어 날실을 고정하는 동안 마당 가득히 퍼지는 햇물을 바라본다. 노랗게 우러나던 물이 하얗게 퍼지는 마당에서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는 새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바라본다. 푸드득 날개를 치며 날아가서는 저희들끼리 짹짹이고, 이렇게 저렇게 콩콩거리다가 잽싸게 마당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입아귀가 올라가게 웃음 짓는다. 작은 몸들이 통통한 대가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먹이를 쪼는 모양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러다가 문득 그것들에게 날개가 없다면 분명 쪼르르 달려가서 몸을 숨기고 앉아 사방을 살피는 쥐의 모양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무심결에 눈을 들어 허공을 보다가 풀잎을 헤치며 콩콩대던 모양을 쥐가 서성이는 것으로 착각하여 비명을 질렀던 날이 생각난다.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었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살피면서도 놀란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날들이 떠오른다. 피식 웃다가 한숨을 쉬고 만다. 새청맞게 악을 써봐야 달려와서 무슨 일이냐고 둘러봐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남몰래 씁쓸한 아침, 서운이가 실사리를 풀며 가는 길을 본다. 열 자의 길이로 네 번씩 열다섯 번을 오고 간 실이다. 복흥댁의 손에서 손으로 옮아가며 고리처럼 엮어진 실을 소쿠리에 담아 일어서던 서운이의 다리가 순간 휘청한다. 바디 끝 참톱대를 도투마리에 걸어 묶느라 쭈그리고 앉았다가 벌떡 일어서다 보니 미처 오금이 다 펴지지 않은 탓이다. 이내 허리를 쭈욱 펴고 소쿠리에 담긴 실사리를 풀어가며 중간쇠가 서 있는 자리로 간다. 제 손으로 돌덩이를 들고 쿵쿵 때려 박았던 중간쇠의 표식이 둥그렇게 남아 있는 자리에 돌아앉은 끄싱개 기둥에 실뭉치를 단단하게 매듭지어 묶는다.
참으로 고된 하루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저희 아씨의 현기증이 일던 마루로 달려가느라 팽개쳐 두었던 삼각대 모양의 비경이를 열자의 중간쯤에 놓는다. 풀칠을 하고 도투마리에 말리는 과정에서 널어진 실이 땅에 닿는 것을 막으려는 것인데, 징검다리 같기도 하고 불쑥 솟아오른 바윗등 같기도 하다.
비경이의 등마루를 건너간 실 줄기는 마당을 가로질러 길게 펴지고 세 여자는 들말의 앞머리에 쭈그리고 앉는다. 내리쬐는 여름날의 햇물을 감당키 어려운 까만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여자들의 손이 바디 끝에서 풀려나온 실들을 가지런하게 고른다. 그리고는 알맞은 크기의 간짓대 네 개를 실과 실 사이에 끼워 넣는다. 꼬무락꼬무락 손가락들을 분주히 움직이며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가로지른 간짓대 두 개의 구멍에 끈을 넣어 엮는다. 풀칠한 날실과 날실이 서로 들러붙지 않게 사침대를 넣고는 바디틀 바깥쪽에 있는 간짓대 두 개를 빼낸다. 도투마리와 바디틀 그리고 사침대와 간짓대가 적당한 거리에서 탄력을 갖게 하고는 열다섯 개의 천조가리를 참톱대에서 풀고 간짓대 사이에서 풀어준다. 꽉 동여매고 있던 숨통이 확 트이는 듯 여자들의 숨소리도 마당으로 퍼진다. 후우우 웅크리고 있던 가슴이 펴지고 허리가 쭉 펴진다.
“질부, 풀을 좀 섞어야겄네. 콩즙 끓인 놈에다가 쌀즙 끓인 년을 쬐깨씩만 섞으소이.”
“예……? 고모님, 쬐깨만이라고 하시면…… 얼마 정도를 넣을까요?”
“으이, 대접으로 세 번이나 될락말락하게 섞으소.”
쌀즙 담은 자배기를 들어 가늠해 가며 콩즙에 섞는다. 물에 섞여 내려오는 덩어리들이 풍덩풍덩 빠진다. 눈가로 튀어 오른 물을 소매 끝으로 닦고는 손을 넣어 조물조물 풀어놓는다. 차가우면서 물컹물컹한 덩어리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며 미끈거린다. 첨벙, 귀얄을 적신다. 속새풀뿌리를 나팔 모양으로 퍼지게 하고 소나무 뿌리껍질로 빈틈없이 둘러 묶은 귀얄이 자배기 속 풀물에 들어가 자맥질을 한다.
“그렇게 푹 넣어갖고 적시면 너무 되직해서 안 될 것인디이. 살짝살짝 적셔야 할 것인디이.”
묽은 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묻은 풀을 자배기 전두리에 툭툭 치며 털어내는 소희를 보며 말하는 복흥댁의 입가가 살짝 올라간다. 콧마루에 주름이 잡히고 눈을 흘기는 모습이 잘못을 나무라면서도 싫지 않은 모양이다. 정갈한 성품에 말이 없는 질부가 나이는 어려도 어딘지 대적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 때때로 조심스러웠는데 베매기 하는 서투른 모양이 어쩐지 정겹고 살갑게 느껴진다.
“긍께, 세상에 쉬운 것이 하나도 없네. 매운 시집살이 살면서 시어미 지청구 안 들을라고 허리 한 번 못 펴고 하루를 지내도 까칠한 숨소리는 불 끄고 누운 아랫목 이불속까지 기어들어오고, 손아래 시누이 가시내 시집도 안 간 것은 새침하게 눈을 뜨고 종조리새 열씨 까듯이 쫑알쫑알 꼬아 바치고 …… 어디 그뿐인가? 전답 마지기 문서 한 장이라도 덜 가져오는가 싶은 마음 배꼽 밑에 사려 넣고는 가다가다 친정집 곳간 밑자리까지 들추어보는 시아비는 호랑새 아니라던가. 앞밭에는 당초 심고 뒷밭에는 고추 심어 시집살이 개집살이는 고추당초보다 더 맵다고 불러대드마는 내 사는 것이나 자네 사는 것이나 한겨울 바람 맞은 통무실세.”
“마님, 말씀도 참 재미나게 잘 허시는디요, 바람 든 통무시는 쫌 너무 했구만이라우. 우리 아씨마님이 아직 이렇게나 젊은디 어디가 바람이 들었당가요?”
“아이구 요년아, 겨울 무시 젊다고 바람 안 들고 통무시 늙었다고 바람든다냐? 아무리 땅속 짚은 곳에 지푸라기 이엉꼬챙이 엮어 덮어놓아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은 어쩔 수 없는 거여어. 푸르딩딩 고실고실헌 대가리 싹둑 잘라내고 한 마디 잘라내면 물은 어디로 갔는가 싹 다 빠져버리고 얼기설기 푸석푸석해진 살들은 매가리 없이 쩍쩍 갈라져 있는디이, 지아무리 솜씨 좋은 만댕이 너머 개망굴 백정이가 잘게 썰고, 그 마누래가 찧어다진 쇠고기 넣고 끓여봐라. 맛탱가리 있는가아. 흥,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디, 쓸디 있다냐? 그냥 뒤엄자리 너매 어디쯤에나 던져두고 말 것이지. 거그서 싹 난다고오, 꽃 핀다고오, 새 무시 될 것이냐?”
“마님은 다 좋은디요, 가끔씩 웃자고 허시는 말씀도 너무 쓰리게 하시는 재주가 있구만요. 우리 아씨 눈물 나겄구만요.”
“바람 든 무시는 뭐 바람 들고 싶어 들었다냐? 쩟, 그렇더라는 것이지.”
복흥댁은 웃자고 한 말이 사생결단하자고 덤벼든 것처럼 후볐다는 생각이 들어 무르춤해진다.
“질부, 사실 말이지,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베매기 하는 것이라네. 명주 아무리 고운 실이라도 이 쌀풀 입히는 것을 잘못 해 놓으면 몇 필을 짜 놓아도 좋은 베로 쳐주지 않네. 그렁께 신경을 써야는디이, 풀이 지나치게 많이 묻거나 빽빽하면 날실이 딱딱해지고오, 너무 묽거나 칠이 덜 되면 실이 힘이 없어서 좋은 베를 짤 수가 없다네. 긍께 이리 실컷 공들여서 베를 짰는디, 너무 뻣뻣허거나 너무 힘이 없어서 흐물흐물 늘어지면 모든 게 허사가 아닌가? 그냥저냥 만들어서 입으면 되겄지만 아무리 폼을 내고 째를 낼라도 멋이 안 사는디, 공력은 들이서 뭣허겄는가? 자네 시어머님 그 짯짯한 성질에 보나마나 들추어보지도 않고는 그냥 마당 너메로 팽개칠 것이네. 더구나 도영이 영전(靈前)에 올릴 것이라는데 말해 무엇 하겠나?”
“예, 고모님. 처음 하는 일이 영 서툴러서 면구스럽습니다.”
“면구스러울 것까지야 뭐 있겠는가? 자네 공력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이 일이 꼭 필요한 일인가 싶을 때가 있어 그러네. 내가 고모라도 시(媤)자가 앞서는 고모라 자네는 멀게 느껴질 것이지만 나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사별을 하고 만 여인네고, 산다는 것이 별반 다를 것 없지 않은가? 달러 봤자 그까짓놈의 것, 오십 보 백 보네.”
말의 끝이 아래로 처진다. 친정집으로 들어와 귀퉁이 방에 눌러앉아 눈칫밥을 먹는 세월이 편할 리 없는 것이다. 그 삶이 오늘 마당을 가로질러 펼쳐진 실〔絲〕강을 한 구비 돌아 한 고비씩 감아 넘어갈 것이다. 도투마리 양 날개를 붙잡고 들어 올려 한 번을 감고 들말에 내꽂는 하루가 뭉툭해진 허리 동강나게 돌아갈 것이다.
소희와 서운이가 마주 앉아 각자의 귀얄을 들고서 처억척 풀을 펴 바른다. 적당히 머금은 솔을 좌우로 칠해 내리고 세 묶음 네 묶음씩 손에 잡히는 대로 움켜쥐고서 쓸어내린다. 풀이 잘 먹도록 손으로 주무르고 골고루 퍼지도록 솔로 문지르는 동작을 열 번 정도를 반복적으로 하는데, 보드랍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명주비단실이라지만 어찌 이물감이 없겠는가. 끈적이는 풀물이 손에 묻고 꾸들꾸들 말라가는 시간의 연속이 어린 청상의 손바닥을 멍들게 한다. 좌우로 오고 가는 동안 풀 먹은 실은 열에 들뜨고 오가는 손길에 식어간다. 그렇게 풀 먹인 부분의 실이 마르면 복흥댁은 일어나 허리를 반으로 접고 도투마리의 양 날개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는 한 바퀴를 돌려 들말의 기둥에 세워놓으면 서운이는 도투마리와 실 사이에 판자형 목대비를 세우고 살짝 들린 공간에 뱃댕이를 끼워 넣는다. 복흥댁의 억센 손이 목대비를 끌어당겨 착 감기게 하고, 뱃댕이가 꼭 맞게 들어가도록 밀어 넣는다. 도투마리의 실 감기는 면적과 같은 크기의 목대비는 두꺼운 종이에 한지를 말아 만든 것인데, 얇게 저민 대를 한지로 감싼 뱃댕이를 꼭 끌어안고서 한 바퀴를 돌아가고 두 바퀴를 돌아서 감긴다. 뱃댕이는 목대비의 품에 안겨서 풀칠된 날실이 서로 엉겨 붙지 않도록 해주고, 도투마리에 감길 실의 간격과 탄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신경 쓰느라 파래진 얼굴을 목대비의 가슴에 묻는다. 중간쇠의 위치에서 삼단으로 쌓인 묵직한 돌을 무릎에 얹고 적당한 탄력을 유지하며 벌 받는 자세로 끌려가는 끄싱개는 세 여자의 고개를 바라본다. 노래 없이는 넘어갈 수 없는 고개, 눈물 없이는 넘어갈 수 없는 고개를 향해 벌 받는 자세로 끌려서 간다.
일흔 번에서 여든 번을 도투마리에 감기는 날실, 서른다섯 번에서 마흔 번을 돌아가는 도투마리, 일흔 개에서 여든 개의 목대비와 뱃댕이의 몸뚱이들을 감싸 안고 돌리는 여자, 복흥댁의 여섯 시간은 열 자의 길목에서 행운을 얻는다. 고무대에서 중간쇠를 돌아 개쇠와 참쇠 막쇠에 걸리던 열 자의 길에서 새까만 숯을 손끝에 묻혀 개미를 찍던 자리에 지푸라기 몇 개를 넣고는 개미집을 넣었다 말한다. 베틀에서 베를 짤 때 중간인 열 자를 짰다는 표시 행운, 한 필의 여정이 끝나는 길에서 가위로 잘린 실은 바디틀에서 두어 자 남짓 떨어진 곳까지 끌려온 끄싱개의 기둥에 걸린 부테와 하나가 된다. 부테는 개톱대를 감고, 끊어낸 열다섯 개의 실은 개톱대에서 다시 열다섯 개의 천조가리에 묶인다. 세 여자의 하루가 흘러가는 동안 도투마리와 끄싱개, 비경이의 밀고 당기고 조이는 시간도 흘러서 간다. 쪼아 먹힌 직녀의 베매기 하루는 버리덕이 공주의 시루에서 당겨지는 환생의 행운을 찾아 길 없는 강에 길을 만들고 그 길 따라올 도영을 부른다.
눈을 뜬다. 낯이 시리다. 문풍지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불 밖으로 드러난 얼굴과 어깨를 후리고 간다. 해질 무렵 서운이가 아궁이 깊은 곳까지 넣어두고 간 장작이 마지막까지 제 몸을 다 태우고 사그라진 지도 꽤 오래되었다. 화르르 오그라지며 타오르는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고 부스러질 듯 바싹 마른 솔가리를 듬뿍듬뿍 넣어 불땀을 좋게 하고는 감나무 잘라낸 가지와 뽕나무 웃자란 가지들을 넣어 주황빛 불꽃들이 너울거리게 했다. 그리고는 방가 태식이 놈이 도끼를 휘둘러 패 놓은 장작을 여덟 팔자 모양으로 벌려 넣고 사이사이로 잔가지들을 넣어 불을 지폈다. 탁, 탁 잔가지들 타오르면서 부러지는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지며 아궁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툭, 툭 잘 마른 장작의 속살들이 두꺼운 껍질 속에서 발라지며 부러지는 소리가 저희들 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어쩌면 그리도 어여쁜가. 눈 내린 겨울밤 툇마루 시렁 위에 얹어 둔 석짝의 뚜껑을 열고 꺼내온 홍시의 속살처럼 붉고, 깊어가는 가을 우물가 두레박에 떨어진 내장산 애기단풍처럼 붉은 것이 자식을 품은 어미의 심장으로 치마폭 겹겹 알알이 붉은 석류의 꽃잎으로 너울거린다. 그 불꽃이 얼굴을 뜨겁게 달구고 뛰는 심장은 차갑게 식히더니, 쭈그리고 앉은 정강이는 복사뼈가 시리도록 이글거렸다.
만물을 충실하게 하되 발동시키지 아니한 달이라는 뜻으로 창월(暢月)이라 부르는 동짓달은…… 빙점이다. 수천 수백만의 결로 이루어진 물의 알갱이들이 모여들어 이루는 결정체들은 계절 따라 다르고, 놓이는 곳에 따라 다르다. 꽁꽁 얼어붙은 땅의 흙을 헤집고 나와 피어난 꽃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저마다의 표정을 짓게 하는 봄날의 물은 수백수천의 몸으로 만나 한 송이 꽃잎으로 피어난다. 오밀조밀하게 모여든 낱낱의 결들이 이루는 하모니는 대설과 소한 사이에 들어 밤이 가장 긴 날, 자정의 달이 가장 높은 곳에 떠올라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새벽은 끝끝내 올 것 같지 않는 동지(冬至), 호한(冱寒)의 절정, 그 밤을 뚫고 나와 새롭게 부활하는 생의 충동으로 피어나는 꽃이다. 드디어 도달한 겨울의 고지, 그곳에서 새롭게 맞는 태양의 훈풍, 흘러가는 물도 아름다운 결정체로 탄생하는 계절, 그것은 극에서 만난 극의 협치였다.
아세(亞歲)라고도 부른다. 작은설이라 부른다.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새롭게 펼쳐질 날들이 빼곡하게 적힌 달력을 선물하며 새날의 행운을 기원하는 날의 절정은 똬리를 틀고 깊이 잠든 구렁이의 글자 사(蛇)를 뒤집어 붙이는 날 밤의 꼭대기에서 길을 나선다. 바로 맞은편에 있을지도 모르는 맹서(猛暑)의 절정을 향해 걸음을 뗀다. 물은 목화솜을 두툼하게 넣어 만든 버선을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에게 선물하던 동지헌말(冬至獻襪)의 날 바쁘게 움직이는 며느리의 시린 발목을 흘러서 또 하나의 결정체를 찾아 떠난다.
망종과 소서 사이에서 물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다. 창월(暢月), 그 화창한 달의 기운이 하지까지 가는 길목에서 기운이 쇠했나? 풋보리 베어다 그을음을 해 먹는 사람들의 들판에서 다리 쉼을 한다. 벼나 보리처럼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리는 태인(泰仁) 사람들의 주린 창자가 절로 불러오는 배고픈 들녘에서 ‘밭보리는 망종 전에 베고 논에는 서둘러 벼를 심으라.’ 던 옛 선인(先人)의 월령가를 듣는다. 맥추(麥秋)를 재촉하는 남풍이 불어오면 누른빛 창연한 들녘에서 타맥장(打麥扙)을 놓자는 선인의 붓끝은 어쩌면 그리도 섬세하고 세밀한가. 섭섭지 않게 조곤조곤 다져가며 훈(訓)을 둔다.
잠농(蠶農)을 마칠 때에는 사나이의 힘을 빌어 누에섶을 만들고 고치나무도 장만하라고 이른다. 고치를 따고는 청명한 날을 가리어서 발 위에 엷게 펴고는 폭양(曝陽)에 말리라 한다. 쌀고치 무리고치 누른 고치 흰 고치 색색이 분별하여 자애를 차려놓고 왕채에 올리면 빙설 같은 실이 감긴다고 말한다. 그것을 사랑홉다 자애소리 금슬(琴瑟) 고르는 듯하니 부녀들 적공 들여 이 재미 보는구나. 탄복이 쏟아진다.
물이 일어선다. 용솟음치던 심장에 깊은 우물을 만들고 맹서의 절정 하지로 들어선다. 햇감자 거두고 햇마늘 거두어들이는 사람들, 그들의 마루에서 포슬포슬 김이 오르는 감자를 본다. 둘러앉은 사람들 흙기미 눌러앉은 감자의 껍질을 벗기며 소금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고, 우물에서 건져낸 열무김치 돌돌 말아 입 안으로 몰아넣는 모습을 본다. 늙은 사람은 껍질도 아까운 모양이다. 괭이 박힌 두터운 손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우걱우걱 씹는다. 도란도란 들려오는 말소리에 한 각의 모서리 꽃뿔이 돋고, 먼지 앉은 마루에 퇴침을 놓고 누운 중노인의 코 고는 소리에 한 각의 모서리는 꽃뿔을 돋운다.
낮이 가장 긴 날, 정오의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며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날, 밤에도 지지 않는 태양으로 대낮같이 환한 백야가 지속될 것 같은 하지(夏至), 그 절정의 꼭대기에서 호미를 들고 나서는 아낙의 뒷모습을 보며 한 각의 꽃뿔이 피어난다. 여섯 개의 각이 저마다의 꽃뿔로 피어나는 계절, 용솟음치던 심장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은 주전자에 담겨 작은 계집아이와 함께 아낙의 밭으로 간다. 수건을 벗으며 인정머리 없는 그늘에 앉아 물을 마시는 아낙의 손에는 우두둑 뿌리째 뽑히는 풀들의 아우성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다.
물이 꽁꽁 어는점에서 얼음이 사르르 녹는점…… 빙점, 그것은 극에서 만난 극이 펼치는 삶의 향연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장작의 불꽃이 마지막 혼으로 일어서는 불잉걸의 꽃불 지짐 되어 스러지는 것을 목도하고도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은자리에서 떠나올 줄 모르던 소희의 초저녁은 아직도 밤이다. 낯이 시린 밤이다.
웬수놈의 밤은 길어 무시로 깨는 잠, 꿈은 질서가 없다. 부끄러움조차 잃었는가. 사북의 자리에 앉아 있다. 무엇인가. 사람의 형상이 아니다. 분명 거울 속에서 본 내가 분명한데 어찌 나비가 되었는가. 본디 나는 이곳에 있는데, 또 하나의 나는 저곳에 앉아 있다. 내가 죽은 것인가. 아니다. 분명 나는 이곳에서 사북 위에 살포시 앉은 나비를 보고 있단 말이다. 차라리 좋다. 모든 굴레 다 벗어버리고 한 마리 나비나 되어 어디로든 날아가 가버리지. 끊임없이 생겨나는 상념과 번뇌, 그것들이 또 하나의 멍에가 되어 칭칭 옭아매면 그것은 또 굳어서 껍데기에 껍데기를 더하는 것일 뿐, 차라리 한 마리 나비나 되어 천년바위 먹빛으로 넝쿨진 난초 꽃잎에나 안겨야지. 꽃모가지 불쑥 솟아 진분홍 곱게 물린 노란 꽃잎에 서부렁섭적 올라앉으면 새의 소리로 퍼지는 합죽선 물결 따라 그림자 서생의 지향점에서 별이 되지 않겠는가.
잠이 들었던가. 입 안이 텁텁하다. 맞물린 이빨 사이에 머무는 혀끝은 서늘하다. 살짝 들린 사이에서 꿈틀거리며 감각을 되찾아가는 혀가 입천장 가운데로 간다. 맞닿는 옴팍한 곳을 쓸다가 꽉 물어 침을 삼키고는 아랫니 움푹 파인 곳으로 내려간다. 우둘우둘 보들보들 혀밑샘 불룩한 것을 간질여본다. 말랑말랑하게 만져지는 느낌이 좋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다. 혀를 내밀어 침을 묻힌다. 까슬까슬한 각질이 도르르 말린다. 냄새가 난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불을 마저 젖히고 자리끼 사발에 손을 뻗는다. 차갑게 밀려드는 사기그릇을 들고 물을 마신다. 비릿하다. 속이 메슥거린다. 갑갑하다. 무릎걸음으로 기어간다. 방문을 연다.
아, 아, 아……
눈이 내렸다. 온 천지에 소복이 쌓인 눈 위로 눈이 내린다. 한줄기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간다. 코끝이 아리다. 순간 눈물이 오른다. 소리도 없이 내린 눈이 봄을 맞는다. 입춘이라 건양다경 입춘첩 대문에 붙기도 전에 눈이 내린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경이로운 봄, 겨울은 죽었다.
겨울이 죽은 마당으로 내려선다. 눈비늘 쓰고 봄을 기다리는 겨울눈이의 굳건한 침묵이 하르르하르르 쌓이며 피어나는 눈꽃에 물든다. 달이 숨은 밤이어도 세상은 밝다. 온통 푸르게 뒤덮던 넝쿨의 잎사귀들이 사그라진 자리에 추억이 돋고, 굳게 닫힌 사당의 솟을대문 너머 새들이 내려앉던 계단에도 눈이 쌓였다. 소희의 발걸음 흔적을 쪼아 먹은 자리에서 바람이 인다. 비늘이 돋는다. 하얀 터럭의 비늘, 눈부시게 흩날리는 자리에 검은 그림자가 선다. 손가락 문양이 점점이 찍힌 갓 위로 눈꽃이 날린다.
소희의 발걸음이 떼어지는 사이 그림자가 바투 다가선다. 이윽히 내려다보는 얼굴, 고요한 얼굴이 소희의 놀란 눈을 들여다본다. 팔을 들어 감싸 안는다. 홍화물 곱게 먹은 도포의 넓은 소맷자락이 소희의 어깨 날갯죽지를 감싸 안는다. 올려다보려는 소희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춘다. 심장이 뛴다. 소희의 심장 한 뼘 위에서 도포의 심장이 고동친다. 메아리친다. 이슬이 맺힌 눈동자에 눈을 맞추고, 오뚝 솟은 콧등에 입술을 둔다. 차갑게 속삭이는 입술이 소희의 입술에 포개진다. 첫날밤의 기억을 갖지 못한 두 사람, 경이로운 봄 눈밭에서 겨울을 죽인다. 명주실 강 뜨겁게 펼쳐지던 여름의 마당에서 칠월칠석 빗물에 젖던 직녀 소희에게 도영은 등이 없는 사람, 속살을 바람에 파 먹힌 채 팔 벌리고 선 사람의 서글픈 모습만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것이 못내 서러워 눈 내린 겨울 봄으로 온 사람, 그의 도포 소맷자락에 싸여 발을 옮긴다. 점점이 찍힌 작은 발, 가지런한 길에 눈이 쌓이고, 오래된 느티나무 두툼한 팽나무와 어깨를 겨루는 동산으로 올라선다.
사북의 자리는 저만치 내려앉은 정자, 내딛는 계단이 끝나는 자리, 그곳에 소희를 앉히고 부채를 모두어 잡은 도포자락이 넓게 펼쳐지는 합죽선의 마당에 선다. 태인 사람들 깊이 잠든 밤, 하연지(下蓮池) 넓은 밭에 시들어 누운 연꽃 줄기들 외로움에 지쳐 고독한 밤, 어디선가 시나위 구슬픈 가락이 사무치게 들려온다. 느린 진양조 버티며 올라서는 거문고 줄 소리가 떠덩 덩 떵~ 장구 소리에 안겨들며 울음을 운다. 홍화물 오련하게 묻어나는 연꽃 동산에 그림자 서생의 버선발이 태사혜 밖에서 시나위 가락을 탄다. 빙그르르 돌며 펼쳐든 부채 팔일(八佾) 언덕에 두둥실 솟고 비스듬히 내려간 오른팔 꺾어 돌며 우수에 젖은 눈망울 짙은 눈썹 아래 가둔다. 애써 웃음을 짓는다. 챙 넓은 갓이 반듯하게 섰다가 살짝 비끼는 사이로 드러난 얼굴선의 윤곽이 소희의 가슴에 새겨진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가 둥근 관자 아래서 음영 짙게 드러난다. 참으로 정갈하다. 손가락으로 더듬어 만져보고 싶다. 유혹이 인다. 부드러운 곡선이 말없이 만져지는 밤, 빙그르르 돌며 수평을 이룬 두 팔이 우루루 달려 물결을 이루고 바람에 날리는 넓은 소맷자락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쓸리는 찰나 그림자 서생은 힘차게 도약하는 한 마리 새가 된다. 춤이라는 것이 매양 이러한 것인가. 바람에 날리는 터럭, 힘차게 비상하는 새, 두고 떠나는 홍심(紅心), 진정 춤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추지나 말 것을 기어이 찾아와 추면서 붙잡아두는 것은 무슨 심사인가.
굿거리 마당으로 올라선 팔일의 언덕에서 오른발 힘차게 디뎌 합죽선 활짝 펼치고 곧게 서더니 왼발 뒷꿈치를 들어 바짝 올린 채 오금을 접었다 펴며 돌아간다. 그림자 서생의 사북이 물오른 모퉁이 겨드랑이 골에 선다. 땅에 붙어 떨어질 수 없는 미련인 양 능선 따라 구불거리던 합죽선 하얀 물결이 속살거리며 퍼지는 쾌자자락의 너울에 실려 붕어배래기 연못의 물결을 차고 나온다. 푹 고꾸라질 듯 곧게 서고 어깨 추어올리며 푹 고꾸라질 듯 일어서는 무릎 안쪽의 오금팽이가 잔뜩 부풀어 오른 개구리울음주머니처럼 태인 사람 잠든 지붕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들판 겨울 보리순 고개 쳐드는 소리로 퍼지는 대금소리에 젖는다.
‘어허 좋다~ 조옿다~’ 힘을 넣어 움츠렸다 펼치며 터트리는 수장구 고수놈의 추임새는 겹으로 묶어둔 보따리를 풀어 밤의 장막을 거두려는 듯 힘차게 퍼지고, 손톱의 날을 세워 꽉 조여 문 매듭을 풀려 꽁꽁 힘을 쓰는 대금은 휩쓸려오다 박차고 오르며 스러지는 물의 살들을 보듬고 퍼진다. 대나무 뿌리 속살을 모조리 파내고 양 옆 툭 터진 곳 한쪽을 오동나무 얇게 저민 판으로 막은 해금이 명주실 두 가닥으로 스러지는 대금의 소리를 옹위하는 밤의 골짜기, 그곳에 갓밝이 물 힘차게 몰아넣는 서생의 합죽선이 화사하게 펴진다. 커다란 날갯죽지 활짝 펴고 움쑥 움쑥 날갯짓하며 광활한 창공으로 솟아오르려는 몸짓, 젖은 미소, 절정의 눈짓, 그 모습에 취하는 소희, 내리던 눈조차 그치고 쌀뜨물처럼 밝아오는 아침…… 연못 속 붕어들도 숨어 잠든 겨울 죽은 봄, 사북의 자리에 앉아 있던 나비 한 마리, 너울너울 춤추는 소맷자락에 안겨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경이로운 봄, 소희의 발걸음 흔적을 쪼아 먹던 자리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