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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den Tui Dec 16. 2022

잔디 깎기

극한직업에  소개해도 될 만큼 어렵네요

잔디는 자연의 푸른 대지를 집안으로 끌고 오려는 삿된(?) 욕망의 발로 같은 것일까? 아니면 숲과 들판,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품는 최소한의 꿈인가? 


내가 작년까지 살고 있던 집은 추측건대 그 옛날, 그러니까 한 100년쯤 전에는 아마도 집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을 것 같은 그런 집이다. 북향을 바라보는 볕 잘 드는 언덕배기에 덩그러니 집 한 채 놓여있는 그런 풍광이었으리라. 집 앞에 넓게 펼쳐진 잔디 경계에는 울타리를 빙 둘러쳐서 울타리 안쪽에서는 소며 양이며 여러 가축들을 방목하듯 풀어두지 않았을까 싶다. 

울타리 끝에는 집 대문 역할을 하는 – 농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 펜스가 놓여 있다. 다 삭아버린 바퀴가 펜스 아래 달려있어서 예전에는 문을 쉽게 여닫을 수 있게 해 주었으리라. 

비록 한 번도 닫아본 적은 없지만. 


그래서 나는 여기가 농장이었던 것으로 나름 추측한다. 낮에는 펜스를 열어 더 넓은 초지로 가축을 내몰아 먹이고, 해질 저녁 무렵 돌아온 가축이 밤에 함부로 나다니지 못하게 막아주는 펜스가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살던 집 안쪽으로 놓여있는 잔디(혹은 목초지)의 면적이 상당했다. 처음 이사 올 때 집주인이 잔디 깎는 비용은 다 내가 부담해야 한다는 소리에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어쨌든 잔디? 까짓것 내 깎으면 되지. 내가 말이야, 어, 이래 봬도 말이야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알아보니 우기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건기에는 두 번 정도 깎아야 관리가 된다고 한다. 집사람이 그냥 정원사한테 맡기는 게 어떻게냐고 조심스레 물어왔지만, 어허 이 사람이 나를 못 믿으시는군.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DIY 공구점이며 중고거래며 여러 제품을 살펴본 후 어느 후덕한 아저씨한테 100불을 주고 낡아 보이는 잔디깎기 기계를 하나 장만했다. 


의욕이 넘치게 시작한 잔디 관리는 금방 난관에 부딪혔다. 

건기고 우기고 간에 이놈의 뉴질랜드 잔디는 정말 열정적으로 자란다. 겨울철 우기에는 풍부한 수량과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온화한 기후 덕에, 여름철 건기에는 풍부한 일조량의 도움으로 정말 무럭무럭 자라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다. 

잔디를 깎는 건 집안관리, 취미생활을 넘어서 거의 노동에 준한다. 열심히 일하고 토요일 오전에 다시 중노동을 하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우리집은 언덕배기라 잔디깎는 기계를 밀며 언덕을 오를라치면 예전 군대에서 깔딱고개를 넘어가는 그 순간이 생각나는 건 내 몸이 느끼는 피곤함의 강도가 대충 그 정도이기 때문인 것 같다. 

넓어도 너무 넓다

토요일 오전 8시 반부터 두 시간을 열심히 달리면 딱 절반을 정리할 수 있다. 그쯤 되면 몸도 기계도 지친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에 귀는 먹먹하고, 겨울철이라도 흘러내린 땀방울에 이미 티셔츠는 흠뻑 젖어버린다. 긴 장화 속에서 이리저리 쓸린 발은 뒤꿈치가 아련히 쓰라리고, 잔뜩 움츠린 어깨는 기계를 미는 그 자세로 굳어버린 것만 같다. 낡은 중고기계는 긴 잔디를 깎느라 지친 기색을 내뿜다 급기야는 작은 모터가 결국에 멈춰버린다. 그러면 그때가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속으로 되뇌는 순간이다. 

나와 잔디깎기 기계가 극적인 합의에 이르는 이른바 물아일체의 경지랄까. 




뒷정리를 마무리하고 샤워한 후에 창 밖을 내다보면 아주 잠깐(거의 찰나에 가까운) 흐뭇한 순간도 있다. 깔끔하게 정리된 잔디를 보면 기분도 상쾌해진다. 하지만 아직 절반은 여전히 깎지 않은걸. 

뭐, 다음 주에 깎아야지.


그다음 주가 이번 주가 되었다. 


마음을 다잡고 나머지 절반을 깎으러 나왔는데. 그 일주일 새에 깎아놓은 절반은 다시 자라 주뼛주뼛 머리를 내미는 잡초며 잔디며 민들레며 나를 향해 흔들거린다. 

이건 뭐, 무한반복의 굴레에 들어선 거지. 

원래는 한 달에 한두 번 깎으면 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건만 실제는 단 한 번의 열외 없이 모든 토요일마다 잔디깎기를 꺼내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매주 땀을 흠뻑 흘리며 잔디를 관리하는데도, 그냥 보기에는 ‘어, 이제 깎을 때가 된 것 같은데’하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잔디 상태. 

어쩌다 한 주를 건너뛰면 그 여파는 무시무시, 어마어마. 합쳐서 어마무시.


금방 다시 자란다... 쑥쑥

결국 보다 못한 아내가 넌지시 물어온다. 

“정원사를 알아보는 게 어때? 내가 물어봤는데 

얼마 안 한데.” 

귀가 솔깃하다. 못 이기는 척, 정 당신이 원한다면 그럴까? 


정원사가 제시한 가격은 회당 70불, 그것도 같은 

면적의, 같은 언덕을 가진 난이도의 다른 집과 비교해 좀 싸게 부른 가격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같은 한국인이라서 말이지. 감사하게도. 

그 뒤로 잔디는 정원사가 맡아서 관리해주신다. 


잔디깎는 기계는 한동안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필요한 다른 분께 잘 전달해 드렸다. 

푸른 잔디에서 느긋하게 뒹구는 당신을 상상하십니까? 잔디깎이 기계와 뒹굴고 씨름하는 당신을 발견하실 겁니다. 


병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잔디는? 정원사에게. 오늘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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