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일리 프로방스 Sep 27. 2024

한시(옛시)로 불러보는 가을노래

정민의 한시미학 산책

이번 여름은 너무나 혹독했다. 폭염과의 동행은 악질 인연이었다. 이런 만남은 한 시즌으로 족하건만 여름은 vip대접을 요구했다.


그렇다 한들 계절은 이길 수 없다. 가을 강물 같은 푸른 하늘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수줍은 듯 숨어있던 달이 얼굴을 내민다. 은하수가 전설을 뿌리는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여름의 흔적은 꼬리를 내고.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달빛이 나무사이를 통과할 때 물 위에 비친 나무 그림자는 더욱 선명해진다. 시간이 떨구어 놓은 여름날의 추억은 마음 깊은 곳에 그림자처럼 새겨져 있다.


한시(옛시) 몇 토막을 되뇌며 가을바다로 항해를 나선다. 정민 교수가 지은 '한시미학 산책'에서 발췌한 시에 감상평을 붙여 보았다.



가 을 저 녁

두 목 (당나라 시인)


은촛불 가을빛에 그림병풍 차가운데

작은 비단부채로 반딧불을 치는구나


하늘가 밤빛이 물처럼 싸늘해도

견우와 직녀성을 어두커니 바라보네.


옛 시에서 가을 부채는 버림받은 여인을 상징하는 도구다. 여름이 다 갔는데 누가 부채질을 할까. 외부의 사물을 끌어와 내면의 정을 토해내는 유니크한 시의 세계가 도드라진다.  


가을 부채를 손에 쥔 여인의 심정을 누가 알까 보냐. 홀로 지새우는 깊은 밤이 찾아오고 달마저 저버린 창가에 반딧불이 날아다닌다.


버림받은 여인의 한이 깊어진다. 옛날 사람들은 풀이 썩으면 반딧불이 된다고 믿었다는데 여인의 속이 썩고 썩어 반딧불로 형상화된 것은 아닐는지.


반딧불은 황폐한 풀 무덤 사이를 날아다니는 곤충이다. 나의 님이 찾아오지 않는 풀 밭엔 잡초만 우거지고 반딧불만 날아다니는 이 헛헛함이여.


무심한 듯 구름은 산 허리를 돌아가는데 가을 하늘을 타고 불면의 밤은 더 깊어만 간다.


이 장면을 서양문화권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갑작스레 연인이 나타나 가슴 절절한 세레나데 한 곡을 부를 것이다.


동양적 수줍은 정서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이 여인에겐 한 조각 로맨스 따위도 사치일 뿐이다. 견우와 직녀는 한 해 한 번이라도 만나 사랑의 결실을 이룰지는 몰라도.


실연당한 이 사람에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올까.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고통을 수반한다.



도 중 ( 途 中 )

권  필  


저물어 외로운 객점에 드니

산 깊어 사립문은 닫지를 않네


닭 울어 앞길을 물으려는데

누런 잎 날 향해 날려 오는구나


권필은 선조임금 시대 당시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산속의 객점, 나그네, 사립문, 늦가을 낙엽... 이 모두가 인생의 덧없음, 외로움, 공허감을 일깨우는 키워드들이다.


깊은 산속 주막집 한 채가 등장한다. 종일 길을 걷다 지친 나그네가 보인다. 해가 서산을 넘어간 한참 후에야 주막집에 들어간다.


 밤중에도 사립문이 열려있다. 사립문 사이 나그네의 불안한 심리가 교차한다.


벌써 닭이 우는 시간. 가을의 새벽은 스산하다. 나그네는 쫓기듯 길을 재촉하는데 추위는 살 속을 파고들지만 어디로 가야 하나 길을 묻는 나그네. 이에 들려오는 대답은 공허한 바람 소리뿐.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누렇게 시든 낙엽들. 늦가을을 함축적으로 가리키는 시어다. 가을의 정취와 허전함이 농익은 과일처럼 가득 차 있는 시다.


나그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한 불안과 초조의 심리는 현대를 사는 우리의 거울로 을비쳐진다.


주막집에서 묵은 하룻밤 인생. 이른 새벽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나의 모습 너의 모습 우리 모두의 거울이다.


미래가 없어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 인생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옛 시의 한 구절에서 오늘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굴절 없이 묻어난다.


 기이하면서도 어쩐지 좀 씁쓸하다. 가을에 듣는 브람스의 교향곡처럼 적막한 노래로 들린다.



소 문 쇄 록

목 은 이 색 (고려 말의 문신)


차가운 밤 고양이는 가까이 붙고

갠 하늘 제비는 높이 나는구나


남은 해 문을 깊이 닫아걸고서

맑은 새벽 나 홀로 뜰을 걸으리.


싸늘해진 가을밤 추위를 못 이기는 고양이 한 마리. 자꾸만 사람 곁을 파고든다. 제비는 하늘 높이 강남 가는 길을 재촉하면서.


 제비와 고양이를 끌어들여 가을의 깊은 서정미를 토닥이고 있다.


나뭇잎이 지듯 모든 것들이 떠나 버린다. 사립문을 닫아걸고 맑은 새벽 홀로 뜰을 거닐어 본다.


여기서 자신과의 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한 사람을 엿볼 수 있다. 구도자와도 같은 삶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일이 이토록 힘겹고 무거운 것일까. 서글픈 허탈감을 안고 인생의 좌표를 찍었던 옛사람.


그에게 비쳤을 보름달이 무심하게 내 위에도 떠 있다. 가을의 고독이 새들처럼 머리 위를 맴돌고 있다.



 

보 림 사 를 지 나 며

백 광 훈 (조 선 중 기 시 인 )


낙엽이 켜켜이 쌓인 명사길에서

찬물은 어지러운 산 달려가는구나


홀로 가다 날 저묾이 근심에  겨운데

구름 저 편 스님이 경쇠를 치네.


가을이 가득 찬 시냇물은 쏜살같이 달아난다. 여름날 백사장 모래 밟는 발걸음에 낙엽 밟은 소리가 포개진다.


떨어진 잎은 뿌리로 돌아가고....  가을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나서는 시간이다. 낙엽은 그것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다.


갈 곳 모르고 시내를 바라보는 나그네의 마음이 문득 바빠진다. 저물어 가는 길 위에 홀연히 덮치듯 땅거미가 밀려온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이제 어디로 가서 하루를 묵어야 하나.


지친 몸 쉬어 갈 안식처는 어디에 있을까. 두서없이 근심만 늘어가는데 댕그랑 댕그랑 은은한 소리가 산사에서 들려온다. 무얼 걱정하느냐고. 여기서 쉬어가라고.



대추 따는 노래

이  달


이웃집 꼬맹이가 대추서리 왔는데

늙은 이 문 나서며 꼬맹이를 쫓는구나


꼬맹이는 되돌아서 노인에게 소리친다

'내년 대추익을 때까지 살지 못할 걸'.


이달은 숙종임금 때의 시인이다. 대추나무를 앞에 두고 짖꿎은 꼬맹이 녀석과 늙은이 사이에 설전이 오간다.


 늙은이 맘에 대추서리하는 꼬맹이 놈이 얼마나 얄미웠을까. 이러다간 일 년 농사 다 망치게 생겼다.


예부터 가평은 잣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청설모들 등살에 잣주인들 근심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청설모는 주인 앞에서 잣을 까먹는다.


솜씨가 기가 막히다. 기계로 돌려 까듯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그것도 주인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농부들 마음은 낙엽에 불이 타듯 열받는다.


대추나무 서리꾼 꼬맹이와 힘없는 늙은이. 잣을 도둑질하는 청설모와 속 썩는 가평의 잣주인. 깨질 듯 파란 하늘만큼이나 색채감이 선명하다.


그나저나 저 꼬맹이 놈 말 좀 들어보소. '어이 늙은이 당신 내년까지도 못살겠어'. 옛 시인이 남긴 단아한 문장 속에 위트와 해학이 익어간다. 가을도 그렇게 깊어가면서.




이전 15화 돌아오지 못할 미지의 나라. 사건의 지평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