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일리 프로방스 Jul 26. 2024

돌아오지 못할 미지의 나라. 사건의 지평선.

윌리엄 셰익스피어

사후세계는 어떤 나그네도 다시 경계를 넘어 돌아오지 못한 미지의 나라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기원전 1213년 어느 날 이집트의 태양이 사막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집트 제국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중얼거렸다. "이생에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저 세상으로 가지고 갈 수 없을까. 이 궁전을 가득 채운 보물들은 나의 힘과 영광을 상징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할 뿐이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면 이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얼마 후 람세스 2세는 피라미드에 모든 재산을 묻고 사라졌다.


서기 1827년 왕가의 골짜기에서 파라오의 무덤을 찾던 영국 원정대가 피라미드를 발견했다. 람세스 2세의 무덤이었다.


 그곳은 이미 파헤쳐져 있었고 대부분 도난당한 상태였다. 죽은 자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한 보물들은 산 자들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이 땅의 경계를 지나 사후 세계로 들어간 자는 누구도 다시 올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이 선언에 누가 의문을 달 수 있겠는가. 그의 문학적 서사는 절절하면서 음습한 느낌을 더해준다.


죽음에 관련한 이야기는 일종의 금기어로 통한다. 장미의 가시처럼 거북스럽고 다루기 어렵다. 그러나 모래사장에 발목이 잡힌 것처럼 이 문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유쾌한 주제는 아니지만 피해 갈 수도 없다. 삶과 죽음 사이에 회색지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사건의 지평선'이 있다. 블랙홀의 경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걸 넘어가면 빛조차 탈출할 수 없는 영역이 열린다는 이론이다.


사건의 지평선 안에서는 어떤 정보나 물체도 외부로 나올 수 없다. 그 안에 영원히 갇혀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알 수 없다.


사건의 지평선은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천체물리학적 패러다임으로 변형된 세계라 할 수 있다.


사건의 지평선,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끝이다. 이는 분명 물리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알 수 없다는 그 미지의 세계가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큰 호기심과 의구심을 품게 한다.


알 수 없는 세계는 더 알고 싶어 진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마지막까지 판노라의 상자 주변을 기웃거린다. 기필코 그 상자를 열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존재다.


그것을 열었을 때 얼마나 큰 비극적 사건들이 일어났던가. 우리는 신화를 통해 잘 알고 있다. 훗날의 결과가 어떻든 당장의 궁금증부터 풀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만이 가진 본성이다. 이에 대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드 브로이는 이렇게 두둔한다.


인간의 지식은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그 너머엔 분명 우리가 놓친 어마어마한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그 무언가'란 무엇일까. 여기서 인간의 위대한 호기심이 작동한다. 호기심은 영원을 향한 본능적 목마름이다.


 그것은 마치 사후세계를 가리키는 북극성과도 같다. 호기심으로 무장한 인간은 신비의 지경으로 방향을 틀어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 초점을 맞춘다.



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탐구정신은 이 영역에 부단한 집중을 기울여 왔다. 상상과 비유의 언어를 동원하면서 말이다.


그리스의 고대 작가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대단히 어둡고 음산하게 그려냈다.


파도가 일렁이는 해안가에 배를 세우고 곰팡이가 된 죽음의 집으로 데려가시오.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 무의식에 깔린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반영한 시구다.


연필로 살짝 긁어댄 렘브란트의 스케치처럼 어둡고 음산하다. 밝은 색 톤의 희망이란 전혀 읽을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오롯이 이런 것뿐인가.


그리스 신화에서 하데스는 죽음의 신이다. 동시에 그가 다스리는 끔찍하고 어두운 세계를 뜻한다. 그리스 전통을 굳건히 계승한 라문학의 최고봉 베르길리우스는 이렇게 이어받는다.


하데스는 달빛이 희미한 밤의 숲처럼 어둡고 칙칙하며 텅 비어 있고 영혼들이 사는 형태 없는 집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런 하데스라도 무비자 입국자는 거절한다. 까다로운 통관절차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일단 아홉 겹으로 둘러싸인 강부터 건너야 한다.


그러자면 뱃사공 카론이 젓는 배에 올라타야 하는 거고. 카론은 두둑한 뱃삯을 챙긴 후에야 망자들의 영혼을 싣고 하데스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의 비위를 건드려선 절대 안 된다. 하데스를 향한 여행길이 험난해지니까 말이다. 운이 나쁘면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저승사자의 갑질이 이만저만 아니다. 인생! 살아서도, 죽어서도 을신세라니. 게다가 저승길에도 돈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놈의 돈! 개탄스럽고 슬픈 일이다. '죽은 귀신보다 산 개가 낫다'는 속담은 그래서 나온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로 그치지 않는다.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의 광대한 스펙트럼은 주로 신화로 포장되어 왔다.


그것은 인간이 거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깊은 흔적을 남겼다. 신화는 이십 대 초반의 백치미에 가깝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아 보인다. 흥미로우면서 사람의 주의를 끈다.


하지만 그걸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청순한 이름다움도 성숙한 아름다움으로 변모해야 진짜 미모다. 그러자면 많은 경험과 시간의 발효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후세계에 관한 경험을 말할 때 임사 체험자들이 단골로 등장한다. 저마다 자신이 사후세계를 방문하고 왔노라 목소리를 높인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물리적 생명이 끝났다거나 거기에 준하는 상태에서 맞이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일관된 진술로는 대개 이런 것들이 있다.


어둔 터널을 지나 영광스러운 빛의 세계로 진입한 후 거기서 전능한 신의 음성을 듣는다. 이미 사망에 이른 사람들과 만남을 갖는다.


그곳에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소리를 듣거나 광경을 목도한다. 거기에 머무는 동안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등등.


우리는 이런 진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문장은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삼중의 벽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시간, 공간, 물질의 벽 말이다.


이 벽을 뚫고 나가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죽음 밖에 없다. 죽기 전엔 아무도 나갈 수 없다. 죽음만이 인생을 가둔 삼중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살아서 나갈 수 없으니 죽어 다시 돌아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예외가 있을까. 시골의 토담집을 생각해 본다.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아 방치된 집이 있다. 매우 허름해져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사람의 육신이 늙고 병들면 토담집과 유사해진다. 쇠락해 가는 신체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신호다. 죽음의 그림자가 창을 가린 커튼을 제치고 찾아온다. 이제 영혼이 떠날 시간이 온 것이다.


허물어져 가는 흙벽돌 사이로 빛이 들어오듯 죽음이 가까워지면 그를 감싼 시간 공간 물질의 삼중 벽이 헐거워지기 시작한다.


생명이 와해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때 그 틈새를 타고 영광의 빛이 새어 들어온다. 이와 동시에 사람의 의식은 떨어졌다 붙었다를 반복한다. 모두가 쇠락한 집과도 같은 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영혼이 사건의 지평선에 바짝 다가서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사후 세계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 나머지 한 발은 이 땅에 두고 있으면서.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저 세상에서 오는 빛을 받으며 메시지를 듣는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중얼거린다. 아마도 임사체험자들은 이때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도 불완전한 지식에 불과하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말할 때 성경은 무어라 증언할까.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린도후서 5장 1절.


'땅에 있는 장막집'이란 우리가 입은 육체를 뜻한다. 다른 한 편에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 이는 죽음 이후의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생에서나 다음 생에서도 인간은 집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집은 인간 영혼이 사는 거처를 말한다.


결국 사람이란 몸을 입은 존재란 뜻이다. 사람은 몸을 벗어난 허깨비나 유령이 아니다.


신화의 이야기처럼 어둠 속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 같은 희미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한 번 가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 사건의 지평선과 같은 결코 알 수 없는 그 세계의 비밀을 성경은 살짝 알려주고 있다.


이것을 계시라 말한다. 계시의 빛을 통해서 죽음 이후에 대한 유일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전 14화 서수필, 쥐도 쓸모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