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쓸모없는 건 하나도 없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을 정도로 귀할 뿐이다. 쓸모가 있어도 얼마나 효용가치가 있느냐는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이지만.
무엇이든 귀한 값으로 평가받으려면 무르익는 과정이 필요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유럽축구 리그나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몸 값은 천문학적이다.
오늘날 손흥민이 있기까지 엄청난 훈련이 있었다고 말하면 진부한 꼰대 잡소리로 들리기 십상이다.
그렇다 해도 십자가 없이 영광 없다는 교훈을 무심하게 비켜갈 수는 없다. 용광로의 불 속을 통과하지 않은 금은 그저 평범한 쇳덩어리에 불과하다. 원석에 붙은 찌끼와 합해져 보기 흉한 물질로 존재하는 것이니까.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되는 건 아니다'. 추사 김정희의 말이다. 어느 분야 든 대가의 말 한마디에는 웅장한 힘이 실려 있다. 추사의 이 한 마디는 왠지 역설적으로 들린다. 명필일수록 붓을 더 가린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예로부터 서예의 대가들이 꼭 갖고 싶어 했던 붓이 있었단다. 바로 서수필이다. 지금도 글을 쓸 때 컴퓨터 자판을 거부하고 아날로그 펜을 고집하는 작가들이 많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어령 선생 집을 작가 김홍신과 최인호가 방문했었다.
이어령은 작가의 상상과 통찰을 말하던 중 그것을 찰나의 순간에 찾아오는 나비로 비유하면서 나비를 잡기 위한 방편으로 속도를 강조했다.
이를 위해선 컴퓨터의 빠른 작업이 필수라 말하면서 펜을 쓰지 말고 언제나 자판을 두드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선생의 충고에 감사를 표하면서 집을 나서자마자 두 작가는 즉각적으로 배신을 때리고 말았다. '우린 나비가 날아가도 좋아 절대로 컴퓨터가 아닌 펜으로만 글을 쓰는 거야 알았지?'. 디지털 도구가 아무리 좋아도 자신에게 안 맞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날로그 마니아들이 꿈꾸는 컬렉션에 만년필이 빠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몽블랑 149, 펠리컨 800, 파커 51 등은 저마다 꿈꾸는 필기도구의 로망이다.
이런 라인업들이야말로 옛 작가들의 서수필을 대체한 뉴 버전이라 할만하다.
음악의 경우 아티스트에게 악기는 생명과도 같다.
최고의 연주자들일수록 명성에 걸맞은 악기를 열망한다.
우리나라의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 씨가 수십억에 달하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소유하고 있다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런 고가의 악기를 가졌다 해서 그것이 사치라고 비난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물론 일반인이 수집을 목표로 사들였다면 다르겠지만.
명첼리스트일수록 첼로의 명기 과르네리우스를 소장하고 싶어 한다. 위대한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피아노의 걸작 스타인웨이를 애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해외 연주에 나설 때도 자신의 손 때 묻은 스타인웨이가 아니면 연주를 거절할 정도였으니까 그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만하다. 이쯤 되면 명필일수록 붓을 가린다는 증거로써 충분하지 않을까. 각 분야의 서수필은 늘 존재한다는 얘기다.
서수필이란 붓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서수(鼠鬚)란 쥐의 수염을 뜻하는데 그것을 모아 만든 붓이 서수필이다. 왜 하필 쥐의 수염일까.
과거에 큰 배들이 긴 항해를 할 때 갑판 아래는 쥐들이 서식하기 일쑤였다. 먹고살기 편한 데다 외부환경에 노출될 일도 없다 보니 이만한 보금자리도 없었을 터. 천적 고양이도 볼 일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배 터지게 밥을 먹고 한 잠잘라치면 쥐들은 갑판 마루에서 준비한 라이브공연을 필청해야만 한다. 명작 서수필이 탄생하기 위한 필수의 커리큘럼이니 비켜갈 수 없다.
삐걱거림의 불협화음에 의한 변주곡이 그것인데 이 음악을 숙달함으로써 비로소 쥐들은 인간이 겪는 온갖 희노애락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싣고 저승으로 실어다 주는 뱃사공 카론이 등장한다. 그가 죽음의 강을 가로질러 노를 저을 때마다 들려오는 예리한 마찰음은 영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었다는데 아마도 배 밑창의 쥐들은 그만큼의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게다.
부드러웠다가 강해지고 시끄럽다가 조용해지고, 베이스톤의 저음부로 낮게 낮게 깔려오다가 홀연히 하늘로 비상하듯 고출력의 소프라노 음으로 일탈해 버린다.
쉴 틈도 없이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로, 스타카토에서 레가토로 이어지는 삐걱거림의 음정 변화는 쥐들의 수염을 극도로 쭈뼛거리게 만든다. 명기는 이 순간에 탄생한다.
쥐들은 해상에서 수강료 한 푼 지불하지 않고 세계 정상급의 음악수업을 받으면서 최고의 명품을 제작하고 있던 셈이다. 쥐들 입장에선 전혀 원치 않는 시련이지만 명필의 손에 들려질 붓을 만들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으니 어찌하랴.
중국 역사상 제일가는 명필 왕희지의 위대한 글씨도 서수필을 통해 쓰였다 하니 지하의 쥐들도 경하해 줘야 하지 않겠나.
세상에 공짜란 없다 말들 한다.
그동안 배에 무단승선하여 호화호식 할 줄 만 알았던 쥐들의 삶도 여간 고단한 게 아니었구나 싶다.
공짜의 대가치고 너무나 혹독했던 것이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하루빨리 하선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을 쥐들을 생각하니 애처로울 뿐이다.
하지만 미물인 쥐에게도 하늘의 섭리가 작용했던 것이다. 괴로움을 견딘 시절이 없이는 명붓 서수필이 탄생하지 못했을 일이었기에 말이다.
배 안에 갇힌 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시련의 용광로 속에서 위대한 그릇으로 준비되고 있었으니까.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키워주기 위함이라".
배 안에서 들볶이던 쥐들이 이런 이치를 알았으랴 마는 저들은 이미 하늘이 운행하는 섭리의 바퀴에 올라 타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오죽 더 하겠는가. 유용한 도구로 쓰임 받는 일이 어렵긴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서수필 한 자루를 통해 배운다.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를 마치던 날
첫 페이지의 서문을 기록할 때, 이순신이 난중일기라는 역사적 기록물을 남길 때, 그분들이 혹시 서수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잠시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