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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Apr 12. 2023

열복이냐 청복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두 개의 시편


   "보름달 밝은 달이 담장에 반쯤 걸리면

     계수나무 그림자가 어른댄다

     바람이 흔들려 그림자가 움직이면

     쟁글 쟁글 그 소리가 사랑스러웠다".


    "나는 내 인생에 여백이 있기를 바란다

      해가 잘 드는 문지방에 앉아

      새벽부터 정오까지

      한없이 공상에 잠기곤 했다

      그러다가 해가 서창문을 비추거나

      멀리 한 길을 달리는

      여행자의 마차 소리를 듣고서야

      문득 시간이 흘러간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이런 날에 나는 밤 사이

      옥수수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소개한 두 편의 글 중 위엣것은 중국 명나라의 시인 귀유광의 것이고 아래는 미국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작품이다.


둘 다 자연 속에서 즐기는 소박한 일상의 한가로움과 여유를 통한 행복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또한 이런 생활을 즐기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열복과 청복 긴 역사


일반적으로 복을 언급할 때 열복과 청복으로 구분한다.

전자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얻어 이루는 복이라면 후자는 그와  다르게 자연으로 도피하여 은둔의 삶을 바라본다.


각자의 인생관에 따라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겠으나 대다수의 경우 청복보다는 열복을 따른다. 세속을 떠나 자연 속으로 들어가 유유자적 행복을 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열복은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요 청복은 누구나 얻을 수 있으나 아무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인생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니까.


전통적으로 중국과 동양권에서는 두 개의 사상적 갈래를 이어왔다.


유교와 노장사상이 그것이다. 유교가 세속적 정치에 관여하여 권력의 정통성과 이데올로기의 모판을 제공했다면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계승한 노장사상은 세속에서 도피할 것을 가르친다.


오직 자연과 벗하면서 무위를 이루는 삶을 목표로 한 것이다. 두 개의 사상은 자의 길을 걷다가 어느 순트래픽이 심해지면서  충돌한다. 이후 다시 합해지는 이른바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간단히 말해 유교가 열복을 추구했다면 노장사상은 청복을 지향한 노선이라 볼 수 있다.


서양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의 사상가들 가운데 견유학파가 있었다. 이들은 세속적 열복에 속한 모든 것을 부정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 속세를 떠나 자연에 은둔했다.


고대를 지나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라이프 스타일의 기초석은 가톨릭 교회가 깔아놓았다. 가톨릭은 사실상 두 개의 시스템으로 분업화 종교다.


하나는 교권제도요 다른 하나는 수도원적 은둔생활이다. 전자의 경우 세속정치와 깊이 연루되어 권력화를 지향하고 있었다면 후자는 그와는 전혀 다르게 이 땅에서의 천국적 이상을 목표로 삼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죽이면서 자발적 가난을 택하여 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열복과 청복의 이분법적 도식은 오래전부터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계몽주의의 깊은 유산



현대의 과학과 기술문명의 뿌리는 계몽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계몽주의야 말로 오늘날 과학적 진보를 가져온 모더니즘의 어머니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첨단의 기술, 그로 인한 의학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다준 공로는 계몽주의가 차지해야 한다. 그 결과 인간의 수명도 크게 늘어나지 않았는가.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어지는 법이다. 계몽주의가 열어놓은 성장과 성공 신드롬은  열복으로 향하는 불타는 욕망을 부추겼으나 그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계몽주의는 칸트의 철학처럼 날카로운 이성과 얼음처럼 차가운 합리주의로 무장하고 있다.


따뜻함 편안함 인간적 열정이나 힐링 등의 언어는 계몽주의 사상 안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이 동네에선 오직 돈 명예 권력이라는 목표치를 향해 잠시도 쉴 틈 없이 전력을 쏟아야 한다. 그래야만 경쟁자를 제치고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현대인은 다들 이런 식의 프레임으로 세뇌받아 왔다. 이 교육은 아주 오래된 현재로서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계몽주의 라는 종교의 한 교리를 따르는 신도로써 살고 있는 것이다. 뱃속에서부터 경쟁이 시작되는 사회다. 유년기와 청년기 장년에 이르도록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명예 권력 돈이라는 열복을 쟁취해야만 한다. 오늘날 성공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을 쉴 새 없이 몰아세우는 이면에는 계몽주의라는 잔혹한 선생이 버티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든 가득 차면 기운다. 달도 차면 기울고 충만한 태평성대 곧 쇠퇴를 고하고 만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둘 때야말로 가장 두려운 일이다. 주식이 최고점을 찍는 순간부터 하락이 시작되듯이 말이다. 이 변함없는 사물의 질서요 이치가 아닌가. 때문에 극단은 언제나 극단을 불러온다.


          노발리스와 도연명


        "인류가 아주 어린 시절

         경이로운 것에 부여했던 의미가

         근대이성(계몽주의)의 발전과 함께 사라졌고

         모든 것이 이기적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뿔뿔이 흩어진 사회의 불안한 마음은

         내면세계의 성찰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고향으로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독일의 빛나는 낭만주의자 노발리스가 내놓은 선언문은 당차기 이를데 없다.


그것도  계몽주의 사슬이 시퍼렇게 맹위를 떨치던 유럽의 한 복판에서 시대정신에 대항해 선포한 도발적 외침이었다. 열복이 아닌 청복을 깨우친 것이다.


세상적 출세로 이끄는 계몽주의는 안타깝게도 고향과 같은 따뜻한 정서를 박탈해 간 건 사실이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열복을 추구하다 보면 이런 맹점은 필연적으로 따르는 잉여물질이다.


 도연명이 남긴 천고의 명문 귀거래사에서 동일한 맥락을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돌아가리로다

      고향의 전원이 황폐해 가는데 어찌 안 돌아 가리요

      실로 길 잃음이 오래지 않았으니

      오늘이 옳고 지난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겠노라

      돌아가리로다 원컨대 교제를 끊고 놀이를 끊으련다.

      만물이 때를 만나 생동함을 볼 때

      내 인생 이제 쉼을 찾아 감을 느낀다".


도시에 오래 살다 보면 전원이 그리워진다. 가끔 한 번씩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힐링이 되어 나온다.


반대로 천하의 자연인이라도 도시 속 문명에 섞임이 필요하다. 사람은 동물과 벗하는 존재가 아닌 사람과 사람이 맞대고 어우러져 사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열복과 청복의 균형


과유불급은 정당한 논리다. 사람은 완전한 열복도 완전한 청복도 얻을 수 없는 존재다. 도시의 향락과 욕망에 함몰된 열복지향의 삶은 공허감을 양산한다.


이때는 청복을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자신을 돌아보고 모든 짐을 잠시 내려놓는다면 삶은 더욱 풍요롭게 될 것이다.


세속을 벗어나 자연 속에 은둔하는 삶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산은 영원히 푸르고 물은 주야로 흘러 그치지 않으나 그것만 보고 만사가 족하다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적당해야 한다.


생활에 있어 큰 걱정이 없고 그렇다고 전혀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닌 정도. 사회와 이웃을 위해 대단한 일은 못했어도 그래도 약간이나마 기여한 정도. 이름은 다소 알려졌지만 유명하지는 않은 정도. 학문과 예술은 추구하되 전문가 까지는 아닌 딜레탕트로써 즐기는 정도.


이런 정도라면 열복과 청복이 균형점을 이루는 썩 괜찮은 행복을 누리는 게 아닐까.


또 한 가지 빠질 수 없는 삶의 필수 자원을 위해선 다음과 같이 기도하며 살고 싶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옵소서


        곧 헛된 말과 거짓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이 누구냐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구약성경 잠언 30장 7~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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