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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Apr 18. 2023

나도 고양이를 묻었다

은퇴 이후 동네 자그마한 교회를 출입했다.

가끔씩 들러 기도하곤 했는데 마침 교회 뒤뜰에 너른 텃밭이 있어 두어 두렁에다 채소를 심고 가꾸었다.


주변이야 다 그렇듯 아파트로 둘러 싸인 전형적 도심권이지만 산이 많고 작은 시내도 흘러 제법 녹색지대가 조성된 건 감사한 일이다.


사람 사는 곳엔 사람만 있는 줄 알았다. 고양이들이 주변에 이렇게 많은 줄을 눈치채기 까지 말이다.


생활이 한적해지고 여유로워지면 보는 시야도 넓어지는 걸까.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동 식물과 사물들이 어느 순간 세세하게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첫 만남


지금까지 고양이 대한 관심은 일도 없이 살아왔으나 사람 만나는 일이 줄어들고 움직이는 영역이 좁아지면서 동물과의 친교도 유익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이 자녀 하나에 쏟는 정성에 버금간다는데 굳이 시간들이고 돈 써 가면서 그런  고생을 왜  할까. 늘 이유가 궁금했다.


기회비용 어쩌고 하는 타산적인 생각이 앞섰던 거다. 다행히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텃밭 출입이 잦아지자 여러 고양이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녀석들 가운데 하나가 꽤나 붙임성 있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일 년생 정도의 삼색이 고양이였는데 이름은 자루였다. 애교가 많은 데다 따스한 정이 넘치는 것이 꼭 교회의 마스코트 같아 꼬마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터였다.


한참 밭 일을 하고 있으면 놈은 어디서 왔는지 야옹 하고 다가와 살갗게 몸을 비벼댔다.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의리는 기본에 속한 것이었.


녀석을 볼 때마다 고양이가 아닌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딜 가든 따라다니다 보니 잘하면 고양이와 운동도 가능하지 겠나 싶었다. 하지만 운동이나 산책을 고양이와 한다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한 낮을 조금 지나 햇볕이 내려 쬘 때면 자루는 예배당 문 앞에 길게 드러누워 있다.


나를 보면 늘 하던 대로 야옹 하며 반갑게 맞이해 준다. 잠시 쓰다듬어 주고 안으로 들어가 기도하고 있으면 교회당 창틀에 앉아 나를 지켜본다.


시간이 많이 지나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창문을 두드리고 소리치면서 문을 열어달라 안달 부린다.


                 예배당의 고양이



녀석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면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기도를 경청한다.


고양이가 취한 경건의 모습이라니! 이때 고양이의 풍모는 마치 선이 청초한 대나무에다 버들나무의 우아함까지 더해진 듯 고고한 기풍으로 가득 차 보인다.


예배당의 고색창연한 침묵 속에 근엄한 풍모의 소나무 하나가 내 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면 인생은 더없이 아름다워진다. 한 사람이 전능하신 분께 기도하고 있는 순간이 고양이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얼마나 기특한가.


세상엔 알 수는 없는 일들로 가득차 있다. 한 시간 정도의 기도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려  생명체가 인간 말고 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늦은 밤시간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향할 때아파트 입구까지 배웅해 주는 일 자루가 맡았다.  


그 대가로 어쩌다 한 번씩 사료나 받아먹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고마운 친구.


중세 때 서양에서 고양이는 마녀의 부하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고양이 전문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최신작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 백과사전>에서 이른 말이다.


일반적으로 중세 시대를 가리켜 암흑기라 부르는데 이는 고양이에게도 마찬가지다.


               고양이의 흑역사


고양이한테 덧 씌어진 어두운 트라우마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나폴레옹이나 루이 십 사세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은 고양이를 끔찍이 싫어했다고 한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거짓과 증오의 산물이었지만 말이다.


고양이는 후각기능이 빼어나게 발전한 동물이다. 실제로 녀석의 후각 기능은 인간에 비해 40배는 앞서 있는데 수용세포가 무려 2억 개인데 반해 사람은 500만 정도에 그친단다. 그들은 후각을 통해 관계를 맺는 생물인 것이다.


머리를 문지르고 부딪치면서 페로몬을 방출하고 그 냄새를 기억해 두었다가 상대가 적인지 친구인지를 간파한다.


 녀석이 깜깜한 밤 인적이 드물었을 때 멀리서 달려와 날 맞아주곤 했는데 알고 보니 이게 다 탁월한 후각기능 덕택이었던 거다.


어느 날 갑자기 자루의 끔찍한 비명소리를 들었다. 목은 다 쉬어 있었고 너무 울어 고통스럽게 변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새끼 고양이 몇 마리가 며칠 새 보이지 않았던 거다. 새끼들은 이미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그걸 알리 없는 엄마는 슬피 울고 다녔던 것이다.


나를 따라다니면서 애처롭게 울어대는 모습이 마치  사라진 새끼를 찾아와 달라는 뜻으로 보였다. 가슴이 아팠으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고양이 자루의 죽음


이후 자루는 시름시름 앓기를 반복하더니 밥도 먹지 않았다. 모성애란 게 이런 걸까. 동물도 큰 충격을 경험하면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녀석의 모습은 그 이후 자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자루가 죽었다는 충격적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음 한쪽이 서늘해져 한 동안 텅 빈 마음의 여백을 메꾸기 힘들었다.


고양이 하면 조선시대 숙종임금의 각별한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숙종은 황금빛 털을 가진 금덕이란 고양이를 키웠는데 금덕이가 죽자 묻어주며 그를 기리는 애도의 글까지 남겼단다.  


<죽은 고양이를 묻다>라는 제목은 숙종의 애묘 금덕이를 향한 애도 시이다. 한 임금의 대단한 고양이 사랑인 것이다.


                고양이를 마음에 묻다


나도 숙종 임금처럼 고양이 자루를 마음속에 묻었다. 그는 잠시동안 내 삶에 머물다 간 스승이었다.


세상에 하찮은 존재는 없다는 것, 비록 미물일지라도 나름 귀중한 가치가 있음을 고양이 한 마리가 설교해 주고 간 것이다.


사람 이상의 정과 도타운 의리 따스함을 안겨주며 내게 기쁨의 빛을 주고 간 고양이를 진심으로 추억하며 고마움을 전한다. 나는 그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졌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자루는 적지 않은 자손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덕분에 나는 자루의 후손들과 교제를 계속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위로의 천사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고양이 자루와의 만남 이후 그의 후손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들 모두 할머니를 았고 성격도 꽤나 밝 쾌활한 녀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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