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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Mar 31. 2023

잘 차려입고 갈 데가 없다?(1)

                     광야에 내던져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인생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우선 센터로 전화 주세요

도와 드릴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은퇴 이후 남들처럼 집 주변 산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익숙해진 산 모퉁이를 돌아서면 낯익은 문구 하나가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마포대교에 서 있는 나를 붙잡는 느낌이랄까. 고달픈 시대의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위로를 주는 메시지라기보다는 왠지 음산하고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말러 교향곡의 어두운 선율이 무의식을 휘감고 지나가듯 말이다.


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만나는 다수의 사람들은 장년기를 지난 은퇴자들이다.

죄다 들 말쑥한 옷차림이다. 세월의 쟁기가 그들 인생을 갈고 지나면서 남긴 흔적이 몸 구석구석 남아 있긴 하지만.


밭고랑처럼 깊이 파인 주름에 쑥 꺼진 얼굴 하며 새털구름을 이고 있는 듯 흰 머리카락과 불쑥 나온 뱃살은 은퇴 이후 노년으로 들어가는 허가증으로 보인다.


이 시대 은퇴자들은 잘 차려입고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지경을 홀로 걸어가고 있다.


무심한 구름이 산 허리를 돌아 사라진 것처럼 젊음의 시간은 떠난 지 이미 오래다.

대신 아득히 멀리 보이던노년기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와 있다.


인생의 마지막 산등성이를 올라야 하는 대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사람들은 곳곳에 서 있는 위태한 아이스폴을 지나야 만 한다.

한 발 헛디디는 순간 천 길 낭떠러지로 몰아가는 죽음의 크레바스도 입을 벌리고 있다.


은퇴 이후의 삶은 분명 이 같은 벽들을 넘어야 하는 위대한 도전이자 기회이면서 동시에 여러 리스크들을 극복해 나가야 하는 큰 시련기이기도 하다.


은퇴 이후는 광야와 빗대어진다.

광야는 우리에게 비교적 낯선 어휘다.


사막과 황무지로 연상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광야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중세의 라틴어만큼이나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광야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장소일까?



컴퓨터 화면을 켜 보시라. 많은 아이콘들 곧 창들이 떠 있다. 알다시피 우리는 이 창들을 통해서만 인터넷에 내장된 무한한 정보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광야는 진정한 삶을 향해 열린 창과 같다.

광야를 이해할 때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저 외롭고 고립된 텅 빈 공간에서는 쓸쓸함과 허무감으로 몸부림치는 것조차 사치일 뿐이다.


시도 때도 없이 혀가 타들어 가는 목마름으로 생명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

낮과 밤의 심한 기온차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생성되는 뜨거운 모래폭풍은 극단적 공포감을 일으키며 온몸을 전율케 만든다.


이런 데서는 꼭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내 코가 석자라 나부터 절박한 상황이니까.

이런 곳이 광야다. 은퇴자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의 책을 가리켜 오경이라 부른다.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된 텍스트 전체의 주 무대가 광야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길고도 오랜 시간 사막의 먼지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을 옛 문서들을 조심스레 열어보면 고대인들이 살았던 삶의 애환과 정서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영원한 침묵을 지키며 사막 한가운데 서 있던 피라미드가

갑자기 움직이며 다가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광야를 지났던 사람들과의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사람의 삶이란 과거나 현재 모두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말이다. 가슴 뛰는 일 아닌가?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은 한순간에 광야의 현실 속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삶은 모호하며 수수께끼와 같은 것. 유대인들이 원해서 그곳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떠 밀려 내던져졌으니까 말이다. 중요한 건 그들이 그런 현실을 받아들여 광야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는 사실이다.


들이 봄날의 미풍을 맞으며 화사하게 핀 정원의 꽃 길을 지나갔다는 건 물론 아니다.


오히려 사막의 뜨거운 햇빛에 정수리를 강타당하며 홀연히 덤벼드는 독사나 전갈의 위협과 마주쳐야 했다.


광야의 길을 걸었던 유대인들의 로드 맵에서

은퇴자들의 삶이 겹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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