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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Apr 25. 2023

철쭉, 봄 날을 점령한 로맨스의 꽃

            가지각색 다재다능의 꽃들


꽃은 향기가 우선이다.

재스민처럼 강한 향이 나는 꽃이 있고 라일락처럼 미묘하면서 은은한 향의 꽃이 있다. 고상한 품격이 있지만 사방으로 향기를 내는 난초도 있다.


꽃들의 빛깔과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저마다 각기 다른 강렬한 개성이 있으니 말이다. 장미는 농염한 여인처럼 다가와 매혹하는 멋이 있다. 청초하고 수줍은 시골처녀 같은 수선화는 어떤가.


한 여름 산자락을 따라  걷다 보면 장승처럼 서 있는 야생의 백합화를 만난다. 사람의 관심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태세다.


백합의 뚱한 이런 모습이 왠지 정겹다. 봄이 만개한 과수원의 진정한 주인은 따로 있다. 화사함의 절정을 뽐내는 복사꽃과 배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철쭉의 지구침공


봄은 철쭉의 세상이다. 철쭉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온 땅을 점령해 버린다. 봄이 당도하기가 무섭게  재빨리 주둔병들이 파견되어 곳곳에 병참기지를 건설한다. 군사들의 무기는 오직 하나. 아름다움이다.


철쭉의 점령지에는 아름다움의 군복을 차려입은 병사들이 복무 중이다. 사람들은 저들을 두 손들어 환영한다. 이상한 일이다. 점령군을 환영하다니.


철쭉은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생활공간에 바짝 붙어 감시하듯 서 있으나 티 날 정도는 아니다. 그저 저만치 혼자 피어 있을 따름이다.  


철쭉의 소규모 군사들은 주로  길 가나 담벼락 공원 학교 놀이터 아파트와 개인주택 등에 주둔한다. 저들을 대면하지 않고 봄을 지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들과는 훨씬 먼 곳에 철쭉의 대규모 군단이 주둔해 있다. 철쭉의 진가는 남쪽 지리산을 시작으로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전국 명산에 터를 잡고 있음을 기억하자.  


봄날의 철쭉은 눈을 번뜩이며 생긋 둘러보는 다람쥐 같다. 저녁 이슬에 옷은 흠뻑 젖어 있어도 아침이 되면 행복한 꿈을 꾼 듯 활짝 웃는다. 참 넉살도 좋은 녀석이다.


티 없이 맑은 창공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철쭉은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낸다. 강풍의 세례가 임했어도 당당하게 선 모습이 꽤나 늠름해 보인다.


산등성이와 계곡을 점령해 버린 철쭉군단을 보라. 이 즈음 온 세상은 철쭉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 즐거운 포로생활이 아닌가.


철쭉이 지배하는 힘은 너무도 강력하여 적어도 유월까지 그 어떤 세력도 반역을 꾀할 수 없을 것이다.

                     

                 

                     야사에 실린 철쭉 이야기


맵시 있는 예쁜 자태와 다르게 철쭉은 비극의 꽃으로 전해졌다. 계모의 학대를 피해 달아난 형을 찾아 나선 동생이 뻐꾸기가 되어 슬피 울다가 피를 토해 죽었다는데 그 피눈물에 싹튼 꽃이 철쭉이란다. 이는 중국판 전설이다. 철쭉에 덧씌워진 이미지가 너무 어둡고 슬프다. 다른 스토리가 없을까.


삼국유사에 다음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신라 성덕왕 때 수로라는 이름의 절세미인이 살았다. 어느 봄날 강릉의 태수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동행하는 길에 한적한 해변에서 점심을 먹었다는데.


그 곁에는 험준한 절벽이 병풍처럼 바닷가에 둘러 있었고 높다란 꼭대기에는 철쭉꽃이 만발해 있었다.


꽃을 유난히 사랑했던 수로부인은 하인들에게 꽃을 꺾어오라 명하였으나 너무 가팔라 감히 꺾어오려는 사람이 없었을 터.


그때 마침 한 노인이 암소를 끌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부인의 말을 듣고 환심을 사려했는지는 몰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에 올라 철쭉을 꺾는 것이었다.


한 아름 철쭉을 바치는 노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멋진 노래 한 가락이 울려나면서.


자줏빛 바위가에 잡은 손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받자 오리이다.


수로부인의 말 한마디가 노인을 이끌어 절벽 꼭대기에 핀 꽃가지를 꺾어 오게 한 것일까.


여자의 머리털 하나가 큰 코끼리를 능히 끌 수 있다는 속담은 괜한 빈 말이 아닌 듯싶다. 이 노래는 '노인의 헌화가'라는 이름의 신라 향가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인생에 황혼이 이르면 젊음의 마지막 햇볕은 옅어지고 어둠이 깔린 나그네의 앞 길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가슴에는 사랑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


격한 로맨스로 달아오른 노인의 열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야 물론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이 꺼진 잿더미 속의 불씨를 살려내어 철쭉꽃 사랑으로 피어나게 한 것이겠지만.


               식지 않을 사랑의 열정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포식자다.

그는 가급적 빨리 행복한 젊은 시절과 등 돌리게 한다.


 병약한 노령의 시간은 얼마나 빨리 찾아오던가.  하지만 그가 떨리는 걸음으로 성큼 다가온다 해도 사랑의 열정만큼은 빼앗아 가지 못한다.


길고 긴 세월이 몸을 왜소하게 만들고 다이아몬드 빛 형형한 목소리가 질박한 저음력으로 바뀌었어도 진실한 마음을 담은 사랑의 찬가는 결코 빛바래지는 않을 것이다.


먼 옛날 강릉의 어느 해변에서 노인이 절세미녀에게 바친 노래는 모차르트의 세레나데를 능가한다.


황혼이 찾아와 노을 지던 무렵 조각배 하나에 몸을 싣고 흘러가는 배 안에서 바라본 풍경이 이런 것까.


아니면 봄날에 만난 두 사람의 짧은 로맨스는 그저 일장춘몽으로 사라진 꿈노래였던가.


꽃은 피었다 지고 달도 차면 기울어진다. 인생의 길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때 거기 있던 사람들은 바람에 쓸려 날아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달빛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그날의 로맨스를 증거하고 있다.


오늘도 봄바람에 비단처럼 고운 철쭉향이 더해지면서 봄날의 기쁨 충만해진다.


철쭉을 감상할 때마다 수로부인과 노인의 로맨스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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