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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May 01. 2023

복사꽃 이야기, 아름답지만 허무한


                        꿈꾸듯 걸었던 길


아득한 꿈길을 걷던 시절이었다.

시골 학교 담장을 따라 산길을 넘어가면 큼직한 호수가 눈앞에 들어온다.


버드나무를 비집고 시냇물을 건너 구름과 맞닿은 야생의 꽃밭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초가집을 돌아 산 언덕배기를 기어오르면 눈부신 세상이 열린다.


 축제가 한창인 연분홍의 세상이라니. 아이들의 꾀죄죄한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하다. 검은색 고무신에 가방 대신 허리에 보자기를 둘러맸다. 달걀 두어 개와 거친 나물밥 소풍날의 특식으로 가져왔고 .


모두가 행복했다. 소풍 가는 그날. 얼마나 설레었던가.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손꼽아 기다렸던 그날을.


돌아보니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다. 얄밉고 야속한 건 시간이라네. 가슴속에 추억의 화살만을 꽂아놓고 멀리 도망쳐 버린 그 시간 말일세.


어린 시절 추억의 한 토막은 다 지워진 줄 알았다. 봄이 되면 그때의 추억이 소환되어 새 순처럼 돋아남은 무슨 영문일까. 아득하다. 핑크빛으로 물든 고향마을의 복사꽃 전경이.


복사꽃은 봄의 아름다움이다.

미인의 요염한 분위기, 그와 딱 들어맞는 꽃이다. 시인들은 봄바람 보슬비를 맞으며 우는 복사꽃의 모습에서 요염함의 극치를 읽었고 봄날의 덧없음과 허무를 알게 되었다.


복사꽃은 사월 말경에 만개한다. 연분홍의 강렬한 색상은 야릇한 에로티시즘을 발산한다. 연분홍은 여성적 온화함과 부드러움, 로맨틱한 감정도 불러오는 색이다.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삼을 때 서양에선 물레방앗간이, 동양에선 복숭아밭이 주요 무대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도 복숭아꽃이 활짝 핀 과수원길을 걷다 보면 잠들었던 기운이 어나 낭만적 기분에 취해 버리고 만다.


                           복사꽃 히스토리


안평대군은 세종임금의 셋째 아들이다. 그가 어느 날 잊을 수 없는 꿈을 꾸었다. 복사꽃으로 뒤덮인 황홀한 전경을 보았던 것.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을 불러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안견의 걸작으로 이름 높은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복사꽃 낙원을 그린 작품이다.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는 도원결의 장면은 시대뛰어넘는 울림이 있다. 이 스토리의 중심무대 또한 복사꽃이 흩날리는 곳이었다.


복사꽃의 이미지는 도연명의 무릉도원 이야기에서 절정에 달한다. 한 농부가 끝없이 흘러가는 강을 따라 배를 저어 갔다. 깊고 깊은 골짜기를 얼마나 지났던가.


복사꽃으로 뒤덮인 세상을 발견한 농부는 자신과 세상을 잊어버린다. 그의 눈에 낙원이 들어온 것이다. 이로부터 천국적 아름다움을 을비치는 강렬한 실루엣은 복사꽃 차지해 버렸다.


화려한 아름다움만이 복사꽃의 전부는 아니다. 감추인 슬픈 이미지가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당나라 최대의 시인 이백은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으로 불린다.


어느 봄날 복사꽃이 활짝 핀 도화원에서 한 바탕 잔치가 열렸다. 잔칫집 분위기와는 다르게 시인의 입에서 슬픔의 곡조가 터져 나왔다.


          뜬 세상 꿈과 같으니 기쁨 이룸이 그 얼마랴



그는 촛불처럼 타다가 사라지는 인생무상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봄꽃이 만개하던 날 시인이 인생의 허무를 강하게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송나라의 위대한 문인 소동파의 글을 보자.


             인생은 봄날의 꿈이 끝나 흔적 없음과 같다.


봄날의 화사함에 취해 환락을 즐기던 순간에 저들의 뒷덜미를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그들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그 무엇 말이다.


복사꽃의 아름다움에서 인생의 허무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그 순간의 깨달음이 기쁨의 술잔을 슬픔의 눈물로 바꾸어 놓은 것.


복사꽃은 아름답지만 허무한 꽃이다. 인생을 지독히도 닮았다. 이 같은 시각은 성경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시편 103장 15~16절


                  아름다움 속에 깃든 허무감


아름다움의 극치에 이를 때 슬픈 감정과 허무감이 함께 오는 이유 무엇인가. 수수께끼 같은 이 문제에 대해 오늘날 뇌과학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사람의 두뇌에는 좌뇌와 우뇌가 있다. 좌뇌는 이성과 수리적 능력을, 우뇌는 기쁨 슬픔 아름다움 등의 감성적 기능을 맡고 있다.


시각이나 청각을 통해 들어오는 예술적 감각은 우뇌의 역할이다. 흥미로운 건 우뇌가 좋아하는 감성적 분위기는 주로 슬픈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점이다.


음악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부분의 노래는 장조가 아닌 구슬픈 단조가 니던가. 기쁘고 밝은 선율보다는 왠지 모르게 슬프고 센티멘탈한 음악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복사꽃의 아름다움에서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과학적 이유이다.


나는 이와 같은 실례를 모차르트 음악에서 발견한다. 모차르트의 협주곡 2악장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슬프다. 그의 어떤 작품이든 예외가 없어 보인다.


전체적으로 서정적이며 낭만적 선율이 분위기를 잡아가지만 곧장 슬픔의 주제가 고개를 내민다. 아름답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아름답다. 두 개의 멜로디가 서로 옷을 바꿔 입으며 춤을 춘다.


모차르트는 복사꽃의 화사한 아름다움을 그에 음악에 끌어들였다. 그 순간 아름다움은 허무함이 깃든 슬픈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시각적 아름다움이 청각적 허무함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순간이다. 그의 음악을 들을 때 자주 눈물을 훔쳤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된 셈이다. 그저 슬프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꽃이 지는 걸 바라보는 일은 또 하나의 슬픔이다. 오월은 그런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동백과 매화가 피더니 진달래 개나리가 피었고 살구꽃 복사꽃이 다시 피고 라일락 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이다.


지고 또 지는 꽃이 아니라 피고 또 피는 꽃의 세상이다. 이런 봄을 거의 백 년 간이나 볼 수 있다는 건 이만저만한 축복이 아니다.


초록으로 가득한 옷을 입고 오월이 찾아왔다. 복사꽃의 화사함에서 인생의 허무를 보았으나 새로운 꽃과 초록의 세상은 녹슨 마음을 새롭게 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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