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일리 프로방스 May 06. 2023

살구꽃 이야기,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가는 꽃

                    꽃들도 조급하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고 울어도 눈물이 없다.

말이 없어 표현은 못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속에 느낌마저 없는 건 아니다. 꽃이 그러하다.


봄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세상을 꽃천국으로 만든 건  벚꽃이다. 영원한 것은 없는 법. 한 차례 비를 맞고 나면 벚꽃도 엔딩을 고한다.


그 순간 꽃들 세계의 질서가 무너진다. 순서를 기다릴 것도 없다. 벚꽃이 사라져 주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자연의 텃밭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꽃들이었다.


그들이 앞다퉈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며칠만 지나면 기회가 영영 사라질까 봐 목이 터질 듯 울어대는 매미처럼 말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각자 자기 때를 알고  있다. 꽃들도 자신의 가치를 맘껏 뽐내는 때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꽃들의 기다림은 숭고한 시간인 것이다.


아름답기로 말하자면 장미나 복사꽃에 비할만한 건 없다. 화려함으로 치자면 해당화가 으뜸이다. 살구꽃을 이들에 비할 수 있을까.


수줍고 왜소해 보이긴 하나 요염함에 있어서는 살구꽃이 앞선다. 겉으로 드러내기 싫어하는 동양적 미인의 전형이 살구꽃일 것이다.


                     서울의 버킷리스트


서울의 인왕산 필운대는 예로부터 봄날에 가야 하는 버킷 리스트에 속했다. 한양의 절경 중 하나로 꼽혔던 것이다.


당시 서울 시내의 가구 절반은 살구꽃으로 덮여 있었다 하니 그 광경이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그랬을까 싶다. 서울이나 전국 할 것 없이 어디에도 살구꽃을 찾아보기 힘든 현재니까.


기껏해야 경복궁과 창덕궁에 몇 그루 정도 남아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에게 익숙한 어사 박문수는 살구꽃의 전경을 보고 난 후 이렇게 썼다.



노래하고 읊조리며 필운대 올라 보니

흰 오얏 꽃 붉은 복사꽃 나무마다 피어 있네

이러한 경치에다 이러한 즐거움으로

태평의 술잔에다 해마다 취하리라.


박문수와 같은 시대를 살던 인물로 박지원이 있다. 그 역시 어느 봄날 인왕산에 올랐다. 이미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 살구꽃으로 덮인 장관에 흠뻑 취해 있었다.


'필운대에서 살구꽃을 구경하면서'라는 그의 시 한 토막은 그때의 장면을 엿보게 한다.


해 저물어 갑자기 어두워지니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지네

꽃 아래 노니는 수많은 사람들

옷과 수염 저마다 볼만하는구나.


                      아몬드는 살구나무인가


흥미롭게도 살구나무는 동서양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비롯하여 여러 본문에도 등장한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창세기 30장 37절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집을 위하여 낸 이론의 지팡이에

움이 나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민수기 17장 8절



창세기 본문의 살구나무를 영어성경(NIV)은 almond tree(아몬드 나무)로, 민수기의 살구열매 역시 almonds(아몬드)로 표기한다.


아몬드 나무가 우리의 살구나무와 완전히 똑같다고는 볼 수 없으나 같은 장미과에 속하는 유사한 식물이다.


살구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식물이었고 고대 페르시아를 거쳐 유럽에도 전파되었다.


살구꽃은 우리의 정서와 깊이 맞닿아 있다. 일제 강점기를 보내던 어두운 시절 이원수 선생은 고향의 봄을 지어 민족적 정서를 이어갔다. 1925년의 일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살구꽃이여 다시 오라


마지막연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는 시골만이 아니라 서울도 그러했다. 벌써 백 년 전쯤의 일이지만.


지금은 우리 곁에서 많이 사라졌으나 살구꽃은 전국적으로, 특히 서울에 지천으로 핀 꽃이었다. 언제부턴가 벚꽃의 위세에 밀려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다.


살구꽃은 예부터 이 땅을 지키며 우리와 삶의 애환을 같이 나눈 벗과 같은 꽃이다. 정겹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인가.


살구꽃이 다시 돌아와 봄날의 아름다움을 밝히는 꽃으로 만나기를 기대한다. 이호우 시인의 낯익은 시가 그런 마음을 대신해 주리라 믿는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작가의 이전글 복사꽃 이야기, 아름답지만 허무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