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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Jun 14. 2024

기억을 믿지 말고 메모를 믿으라

다산 정약용과 니클라스 루만의 메모법

기억을 믿지 말고 손을 믿어 부지런히 메모하라. 메모는 생각의 실마리다. 메모가 있어야 기억이 복원된다.

습관처럼 적고 본능으로 기록하라.

다산 정 약 용



공부는 메모로 시작하여 메모로 끝난다. 독서광은 메모광이다. 메모 없는 독서는 허공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처럼 허무하지만 메모로 가득한 독서는 물고기를 가득 채운 바구니처럼 실속 있다.


메모 한 줄 없는 깨끗한 책을 생각해 보라. 추수걷이가 끝난 가을의 들녘만큼이나 헛헛하지 않은가.


메모는 생각이 발아하는 저장소다. 가득 싸인 메모들은 오랜 시간의 숙성을 거쳐 생각의 꽃으로 피어난다.


인간의 기억엔 한계가 있다. 헤르만 에빙하우스는 망각곡선 이론에서 이 점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책을 읽은 뒤 십 분이 지나면 망각이 시작된다. 한 시간 후엔 50%, 하루 지나면 70%, 한 달 지나면 80%를 잊어버린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망각하는 존재다. 슬프게도 망각은 모든 기억을 안드로메다 성운으로 끌고 가버린다.


이런 불상사를 극복하려면 주기적으로 복습해서 기억을 다시 살려내야만 한다. 이 과정을 거칠 때 기억은 뇌의 장기기억 회로에 저장되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얻은 정보와 지식을 메모해 두어야 하는 명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서와 메모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메모는 사라지는 기억의 한계로부터 생각을 지키는 방어기제다.


메모를 무시하면 기억은 사라지고 생각도 떠나 버린다. 독서를 통한 공부는 기억과 생각을 잘 관리하는 일이다.


 어느 날 퍼뜩 스쳐가는 생각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이런 생각은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보물과 같다. 이것을 붙들지 않으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적어둘 때만 내 것이 된다. 생각은 아무나 하지만 누구나 적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문제다. 적을 때 비로소 생각이 기록으로 남는다.


노트에 손으로 써 가며 기록할 때 생각이 발전한다. 메모를 통해 생각이 정리되면 글쓰기가 쉽게 이루어진다.


열하일기의 작가 연암 박지원은 항상 메모할 준비가 되어있던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가 여행하는 도중에도 주변정보를 놓치지 않고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다.


찰스 다윈은 작은 배를 타고 남미대륙을 횡단했다. 대장정에 오른 후 오 년간 관찰한 것들을 빼곡히 적어 기록으로 남겼다. 종의 기원이나 그의 다른 작품들은 이 같은 메모의 결과물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이작 뉴턴, 애디슨 같은 인물들은 또 어떤가. 그들 역시 메모를 빼놓고 논하긴 힘들 것이다.


메모는 창의성을 부르는 가장 훌륭한 도구다. 창의성이란 서로 다른 생각들이 빙벽처럼 충돌하면서 새롭고 독특한 방식으로 연결되는 일이다.


성질이 다른 물질이 부딪혀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 새로운 것들이 생성된다.


 메모들의 연결과정은 일종의 지적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메모해 둔 정보들이 서로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유니크한 지식을 양산하는 것이다.


무작위로 적힌 자료들이 뒤섞이면서 독창적 아이디어로 떠오를 때면 그만 황홀해진다.



메모를 말할 때 '묘계질서'라는 잠언이 쉽게 떠오른다. '묘계'란 오묘한 깨달음을 뜻한다. 이것을 붙들어 두려면 메모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섬광 같은 깨달음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기 전에 잽싸게 적어두어야 한다. 이를 '질서'라 말한다. 요즘말로 묘계는 아이디어, 질서는 메모다.


아이디어는 번개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번개를 사진에 담으려면 카메라를 켜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메모는 아이디어를 담아내는 카메라다. 이 카메라는 항상 켜져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묘계질서의 원리를 좇아 책을 읽고 메모했다.


거처하는 곳마다 붓과 벼루가 마련되어 있었단다. 자다가도 영감이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 촛불을 켜고 적어두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붓이나 벼루가 필요 없다. 스마트 폰 하나로 이 모든 게 가능하니 말이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 하였으니, 이는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보인다는 말이다.

다만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손으로 직접 베껴 써야 한다."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메모만이 자기경영의 시작이고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경쟁력이다. 기록이 기억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냥 편하게 읽기만 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메모의 방식 가운데 필사작업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필사의 중요성은 예부터 독서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바다.



다산 정약용의 초서법이 대표적이다. 초서란 문장을 그대로 베껴 쓰는 방식을 말한다. 무작정 베끼기는 건 아니다.


 초서한 메모를 일정한 주제로 배열하여 보관해 두었다가 책으로 엮어냈던 것이다.


다산은 강진유배 십팔 년동안 이 방법으로 엄청난 양의 메모를 해두었다. 그가 이룩한 메모는 수백 권에 이르는 다작을 가능하게 했다.


"체텔카스텐은 나의 두 번째 뇌이다. 동시에 이 메모 시스템은 나의 두 번째 기억이다."

니클라스 루만


독일 빌레펠트 대학의 사회학교수 니클라스 루만의 메모법이 화제다. 그는 '체텔카스텐'으로 불리는 독특한 메모방식을 애용했다.


'체텔카스텐'이란 메모상자를 뜻하는데 독서 중에 얻은 아이디어나 중요내용을 인덱스카드에 적어 상자에 보관하는 방식이다.


각각의 메모들은 숫자로 연결되어 디지털 기능의 태그역할을 수행한다.


루만 교수가 일평생 남긴 인덱스카드는 무려 9만여 개에 달했는데 이것들은 백 권에 이르는 책과 400편의 논문을 써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의 메모상자는 창의력을 불러일으키는 지적 신경망이자 서로 다른 주제를 연결시키는 네트워킹 역할을 한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은 메모법에 있어 독일의 정약용이라 부를만하다. 두 사람 간 메모방식과 그 유사성이 그만큼 비슷하다.


루만 교수의 경우 순전히 아날로그 방식만을 고집했는데 이것을 디지털 방식으로 바꾼 앱이 나왔다.


옵시디언 메모 프로그램이 그것인데 니클라스 루만의 메모철학과 스타일을 디지털 메모기능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기존의 노션이나 에버노트 메모앱보다 기능이나 효과면에서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용자들 간 호불호가 갈리는 문제라서 객관적 평가는 매우 조심스럽다.


클라우드 방식이 아닌 하드웨어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메모의 저장공간을 독립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차원적 방식의 태그 기능은 보다 입체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가교역할을 하는데 이 또한 무시할 수 없겠다.


메모앱의 다양한 출현은 메모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순기능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아무리 빼어난 디지털 기능의 프로그램이 있더라도 메모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메모의 방식이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것은 본인의 취향일 뿐이고 선택의 문제다.


메모를 하자면 누구나 시행착오를 거친다.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메모할 때 조금은 번거로워도 손으로 노트에 필사하는 과정을 거친 후 이걸 다시 디지털로 바꾸는 게 어떨까 싶다.


메모의 프로세스를 거듭 거치면서 자동적으로 복습이 이루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메모들 사이의 충돌과 필터링이 일어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건 큰 덤이다.



남들보다 앞서 가는 사람은 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 메모하는 사람이다.


메모의 습관을 지속하다 보면 노트에 정보와 데이터가 쌓여 업무에 있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내공이 생긴다.


메모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해야 맞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 강의시간이나 길을 걸을 때, 샤워할 때를 불문하고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살면서 잃지 말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자존감과 자신감이다.


이 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나치지 않다. 정체되고 무기력한 삶을 사느냐 혹은 앞으로 나가는 활기찬 삶을 사느냐는 자존감과 자신감 여부에 달려 있다.


위대한 사람들은 기록하면서 자신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길렀다. 일기를 쓰면서도 작은 성취감을 점차 큰 목표로 확대해 나갈 수 있지 않은가.


 소소하지만 그동안 이룬 업적을 기록하고 반성하면서 어제보다 성장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건 메모하는 사람들이 누릴 특권이다.


한 분야의 일인자가 되기 위해선 10년간의 꾸준한 집중력과 투자가 필요하단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지만 메모 10년이면 인생이 바뀐다.


이는 다산 정약용과 니클라스 루만 교수의 사례에서 증거되고 있다.


메모해서 손해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런 리스크 없이 성공투자가 가능한 건 메모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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