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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Jun 28. 2024

위로의 선물, 하나님의 평화.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인생은 광야를 걸어가는 나그넷길이다. 수고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삶의 유일한 휴식조차 슬픔의 버드나무 아래서 보낸다.


슬픔과 탄식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다.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떠날 줄을 모른다. 어쩌면 하늘문가에 이를 때까지 이들과 동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밤에는 저주의 서리가 내릴지라도 아침에 찾아오는 위로의 이슬도 있으니까.


구약성경에 나타난 광야는 언제나 위험이 상존하는 공간이었다. 모래 속에 숨어있는 불뱀과 전갈은 전장의 지뢰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


물리는 순간 황천길로 직행한다. 섭씨 40여 도에 이르는 더위는 가마솥 찜질방과 닮아있다. 시로코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가면 더위에 지친 사람을 거의 미치게 만든다.


밤에도 안전하지 않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기온이 요술을 부린다. 영하로 뚝 떨어지니까 말이다. 극단의 기후가 널뛰듯 하는 광야는 참혹한 훈련의 장소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먹고 마시며 입고 거주하는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부족하다. 만족이란 단어는 차라리 지워버려야 속편하다.


수시로 목이 타들어 간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모래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광야가 잡아끄는 중력이 너무 강해 날이 갈수록 버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곳이라면 누군가의 도움과 위로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다들 힘들다. 누가 누구를 돕는단 말인가.


단테는 지옥을 묘사할 때 "이곳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리라" 했는데 굳이 지옥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다. 광야에 들어서는 순간 단테의 말뜻을 충분히 직감할 수 있으니까.


옛적 히브리 백성들은 이곳에서 무려 40년을 보냈단다.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그들의 시간. 이것은 무엇을 상징할까.


성경에 따르면 인생의 무대가 광야와 같다고 주저 없이 밝힌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하루하루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광야인 거다. 지금 나는 그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히브리 백성들이 걸었던 광야길 40년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그들의 사건과 경험은 현재의 나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 편 23편 4절.



이 말씀은 무려 3천 년의 시공간을 통과하여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다.


굶주린 새들이 어선 주위를 맴돌듯 상심한 영혼들마다 이 말씀에 몰려들었을 터였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 그늘이 더위를 식혀주듯 이 구절은 오랜 세월 위로의 느티나무가 되어 주었다.


이 땅에 들어온 사람은 예외 없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사방이 겹겹이 에워싸여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다. 손에 잡히는 것도 없다. 온통 컴컴하기만 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울부짖는 사나운 짐승들이 여기저기서 날뛰고 있다. 이곳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가.


세상은 전쟁으로 들끓고 있다. 핵전쟁의 위협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린다. 생태계는 몸살을 앓고 있다.


급격한 기후변화로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하루하루 사는 게 전쟁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업이 망해 길거리에 내몰린 사람들, 암을 선고받아 시한부에 들어선 사람들, 이혼으로 가정이 깨져 상실감에 빠진 사람들,


우울증과 벗하며 불면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현실에 좌절하여 낙망하는 사람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안절부절못하며 마음의 평화를 잃고 사는 사람들... 헤아리기도 힘들다.


눈만 뜨면 걱정거리가 태산과 같다. 염려로 숨을 쉬며 두려움으로 이불을 삼는다. 이런 현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표현대로 삶은 이 골짜기를 통과하는 힘겨운 여정이자 의무이며 감당해야 할 부역이다.


얼마 전 지인의 어린 자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수십 년 전 목회하던 교회의 교우들이었다. 소식을 접한 나로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장례 식장을 찾았을 때 그들을 향해 뭐라 할 말이 없어 함께 울어줄 따름이었다. 그동안 임종에서 하관까지 많은 장례를 인도했었지만 이런 경우 슬픔을 감내하기 힘들다. 하물며 유가족들은 어떨까.


저들의 아픔을 누가 어루만지며 위로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삶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산소호흡기를 끼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아들을 지켜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무너져 가던 내게 하나님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 힘으로 일어났고 아들을 고이 하늘나라로 보낼 수 있었어요. 감사하게도 아들의 장기기증을 통해 다섯 명이나 새 새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려주는 부모의 얼굴엔 측량할 수 없는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


이 평화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아니고 무엇인가. 단언컨대 우리는 이 위로 없이는 살 수 없는 인생들이다.


오래전에 읽은 강유일 작가의 간증이 생각난다. 끔찍이도 사랑했던 남편을 암으로 잃고 실의에 빠진 그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조차 상실해 버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기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사람은 무서운 존재로 돌변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돌파한 사람에게 이 세상을 향한 미련이나 두려움 따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강유일이 그러했을 것이다.


이때 드리는 기도는 죽음도 불사하는 기도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며 하나님 말씀이 마음속에 불처럼 새겨졌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한복음 14장 1절).


인생 가운데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한다 한들 그건 말장난, 빈 말에 불과하다.


전능하신 자만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고 즉각적인 효력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강유일은 그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좌절과 절망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가슴은 벅찬 감격과 소망으로 불타 올랐다.


얼마 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유학하여 새로운 인생을 꾸려나갔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였던 것이다.



성경에서 인생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항해다. 사람은 예외 없이 시련의 태평양을 건너기로 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폭풍우와 풍랑은 항해하는 자들이 만날 손님들이다. 잠시의 고요함조차도 다가올 손님들을 예고할 뿐이다.


1912년에 일어났던 타이태닉호의 비극은 예기치 않은 기상악화와 인간의 자만이 빚어낸 합작물이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호화여객선조차 거대한 빙벽 앞에선 종이조각에 불과했다. 파선당한 배가 침몰하면서 모두가 바다의 제물이 되어야만 했다.


이 장면을 그린 영화의 한 컷은 격한 감동과 울림을 준다. 사람들이 죽음의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지면서 이별을 고하고 있을 때, 현악 오중주의 선상악단이 찬송가를 들려주며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었다.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찬송가 338장(Nearer, My God, to Thee).


사망의 혀를 날름 대던 대서양의 검은 물결이 천상의 멜로디에 놀라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에게 필요한 건 위로임을 알려주는 메시지 아닌가.


호레이쇼 스패포드는 미국 시카고의 변호사이자 신실한 신자였다. 그에게 인생의 참혹한 풍랑이 덮치고 말았다.


 1871년 시카고의 대화재로 대부분의 재산이 소실되었고 2년 후엔 대서양을 건너던 네 명의 딸들이 배의 침몰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런 비극 앞에서 사람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까. 그가 지은 다음의 찬송 시가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찬 송 가 413장.


이런 고백은 하나님의 위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란 무엇일까.


신약성경 빌립보서의 저자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장 6절~7절.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평강이 곧 하나님의 위로다. 강호의 동양학자 조용헌은 기독교의 샬롬 곧 평강을 내공이라 말한다.


그러나 내공이 고도의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비범한 자들의 특권이라면 평강은 그런 것이 아니다.


평강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선물이다. 평강은 고통으로 찢긴 마음을 치유하고 지켜주는 하늘의 파수꾼이다.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 반드시 도와주겠다. 사람은 너를 버리고 떠났어도 나는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라'. 이것이 위로의 선물,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다.


인생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비참하다 해도, 광야의 길이 제아무리 고통스럽고 험난해도,


폭풍우가 몰아치는 항해가 두렵다 해도, 하나님의 위로인 평화가 있다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의 고백이 가능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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