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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Jul 12. 2024

이인자로 살아남기, 안색을 살피셨습니까?

논어의 이인자론

"윗사람의 안색을 보지도 않고 내키는 대로 말하는 것을 눈뜬장님이라 한다".

 논어 계씨 편


호랑이와 표범은 생태계 초상위 포식자들이다. 한반도와 시베리아를 아우른 광활한 영역에서 살아간다.


표범은 힘과 체급에서 호랑이게 밀린다. 맞부딪쳐 싸울 상대가 되지 못하는 거다.


그닥 유쾌한 건 아니지만 이인자 신세다. 표범은 이걸 잘 알고 있다. 하여 나름 생존전략을 터득해 왔다.


표범은 환경변화에 민감하다. 두뇌 회전이 빠르다. 적응력도 뛰어나다. 임기응변에 능해 호랑이의 출몰지역을 피해 다닐 만큼 은밀하고 조심스럽다.


나무 타기와 사냥기술은 탁월하다. 호랑이와 구별되는 전문성도 갖췄다. 무엇보다 이 짐승은 숲의 제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


큰 형님의 안색을 살피고 산다는 거다. 두 맹수의 관계에서 얻을 교훈이 적지않아 보인다.


사람들은 서열화를 싫어한다. 거의 본능에 가깝다. 현실의 상황은 어떤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이인자 그룹에 끼어 있다.


 회사의 직원들이라면 누구나 이인자의 자리에 있는 것 아닌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문제는 하나로 집약된다. '이인자 노릇을 어떻게 하느냐'이다.


직장생활은 시베리아나 한반도의 자연환경을 인위적 공간으로 옮겨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 호랑이 상사 밑에 표범 직원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런 관계망은 견디지 힘든 구조다. 계속 머물자니 스트레스요, 박차고 나가자니 생계가 걸린다. 사회와 직장은 갈등의 연속이다.


호기 좋게 나간다 해도 호랑이를 피하다가 곰을 만날 수 있는 게 인생이다. 힘들게 잡은 모처럼 기회도 날려 버릴 수 있는 거고. 셰익스피어는 잘 말했다.


인간사회엔 기회란 것이 있는 법이다. 기회를 잘 타면 성공에 이르지만 놓치면 인생항로는 여울에 처박혀 불행하기 마련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그러니 어찌할까. 호랑이를 다루는 표범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논어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 오래된 책에서 말이다.


사람 사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뜻일 게다. 논어에서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서 말했지만 지금의 상사와 직원관계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윗사람의 안색을 보지도 않고 내키는 대로 말하는 것을 눈뜬장님이라 한다".


안색을 본다는 것은 얼굴빛을 통해 그 사람의 속내까지 알아낸다는 뜻이다. 그냥 눈치 빠른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상대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고수의 영역인 거다. 남의 밑에서 이인자로 있자면 터득해야 하는 표범의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야 다치지 않고 오래 견딜 수 있다.


세상은 바른말하는 사람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기주장만 옳다고 말한다면 철부지로 낙인찍힌다.


인간관계, 나와 너 사이엔 온도차가 존재한다. 이걸 파악하고 말을 해야 뒤탈이 없다.


질병 치료의 경우 예후가 중요하다. 치료 후의 결과 말이다. 예후가 안 좋으면 아무리 좋은 치료를 했어도 헛것이며 그 의사는 명의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어떤 말을 했을 때 반응을 미리 내다보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안색을 살핀다는 뜻이다.


조선의 군주 가운데 사람 알아보는 일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있었다. 세종대왕의 부친 태종이다.


어느 날 태종이 조정의 대신들에게 깜짝 놀랄 빅뉴스를 던졌다. 불혹의 나이에 든 그가 당시 세자였던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충격적 소식이었다. 일종의 간 보기였다.


당시 최고의 권세가로 이숙번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50이 되어서야 비로소 혈기가 쇠하니 나이 50 되기를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왕의 역린을 건드린 말이다.


 태종이 쳐놓은 덫에 걸려든 것이다. 이숙번은 태종의 안색을 살피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왕의 속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말한 '눈뜬장님'이었던 거다.


이것이 뭐 그리 잘못인가.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이숙번은 태종이 말하고자 하는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신하였다.


예후가 좋지 않았다. 얼마후 유배의 길을 떠났으니까. 이것이 냉엄한 권력의 세계요 세상이 돌아가는 형국이다.



태종에서 세종에 이르기까지 재상으로서 탁월함을 인정받았던 인물로 하륜이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말했을까.


'주상의 춘추가 60이나 70이 되었거나, 세자의 나이가 삼사십에 달했다 해도 불가할 텐데, 하물며 지금 주상의 나이가 한창때이고 세자도 아직 어리니 절대불가 합니다'. 왕의 안색을 살핀 말이었다.


이 말이 하륜의 천박한 아부였을까. 그건 현실의 인간관계를 너무 경시한 생각이다. 하륜은 넘볼 수 없는 권력 앞에 서 있던 이인자에 불과했다.


자신의 포지션을 잘 인지했던 그였다. 그의 말이 곧 처세술이었음을 웅변해 준다.


스스로의 한계를 지키고 조심하며 경계했던 것이다. 작은 말 한마디가 인생을 수렁으로 몰고갈 수 있다. 얼마든지.


"저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더라." 하륜에 대한 태종의 평가가 그러했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하륜은 일인자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 재상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논어와 서경을 공부하며 그 가르침에 정통했다.


경전으로부터 길어올린 지혜를 흡수하여 현실에 적용했던 것이다. 격랑의 시기에 정글 같은 권력의 소굴에서 비명횡사를 면하고 명예와 권력을 향유할 수 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


서경에 이인자에게 주는 그러한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네게 만일 좋은 계책과 좋은 생각이 있거든 곧장 들어가 너의 왕에게 고하고 밖으로 네가 그것을 알릴 때는

이 계책과 이 꾀는 오직 우리 왕의 덕분이라 하라.

서경 군진 편.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자공이란 인물이 있다. 어느 날 그가 스승에게 물었다. "남의 아래 있으면서 남의 아래 있는 도리를 알지 못합니다". 이에 공자가 대답했다.


이인자로 남아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흙과 같아야 한다. 씨앗을 뿌리면 오곡이 자라나고 거기를 파면 단 샘물이 나오며 초목을 심어주고 짐승을 길러주며


산 사람을 서게 하고 죽은 사람을 들어가게 하니 공로는 많지만 그것을 내세워 말하지 않는다.

이한우의 설원(상) 유향 찬집 완역 해설: ‘말의 정원’에서 만난 <논어>


이인자는 흙과 같다는 표현이 끌린다. 흙의 공로는 대단하다. 그러나 흙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에 이인자의 정체성이 숨어있다. 공을 세워놓고 그걸 내세우지 않는 지혜라니.


우리나라 역대 정치인들 가운데 김종필이 있다. 사 대의 권력을 지나면서 40여 년을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격동의 시대를 만년 이인자로 보냈다. 그의 저서 '성공의 법칙, 이등으로 살아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 이등이 실속 있다. 둘째 우두머리와 싸우지 않는다. 셋째 오늘의 적만이 아니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이인자로 산 김종필의 처세술이었다. 표범과 닮지 않았는가.



토사구팽이란 사자성어는 그리 유쾌한 격언은 아니다. 한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한신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유방의 한나라를 세운 일등공신이었으나 살해되고 말았다. 때를 분간하지 못했고 왕의 뜻을 살피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신은 유방의 권력에 겸손으로 섬길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고 대우받기를 원했다. 이런 태도는 이인자라면 버려야 할 치명적 단점이다.


이인자는 주군보다 드러나면 안 된다. 흙과 같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이인자들의 생태계다. 고대인의 처세술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고대 로마의 최전성기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시기라 할 수 있다. 로마의 명운이 걸린 악티움 해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자는 아그리파였다.


그는 영토확장에 큰 공을 세웠고 왕권의 안정에도 기여했던 사람이었다. 나아가 황제의 동료이자 이인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바로 그때 권력에서 내려왔다.


가장 화려한 시절에 나무 뒤로 숨어 스스로를 가린 것이다. 한신과는 다르게. 아그리파는 황제의 안색을 제대로 살핀 인물이었다.


화창한 날 이름다운 꽃밭에는 뱀들이 숨어 있다. 이걸 잊으면 물리는 건 시간문제다. 이인자는 평화로운 시대가 더 위태롭다.


지중해권 세계가 평화의 물결로 잔잔하던 팍스 로마나 시대에 아그리파는 자기 일을 찾았다.


로마시내의 공공건물과 인프라 건설에 전력했다. 행정 시스템과 문화적 발전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도로와 수도교 판테온 신전에 이른 위대한 건축물들은 아그리파를 떠나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아그리파는 완벽한 이인자 모델이었다.


이인자로서의 삶이 그를 더 위대하게 했다. 남의 밑에서 이인자로 성공하자면 잊지 말아야 할 물음 한 가지가 있다.


"안색을 살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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