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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Jul 05. 2024

불안 두려움 공황장애, 그림자냐 그늘이냐?

장자의 제물론

"인간은 그 본성상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기 발자국을 싫어한다. 이것들을 벗어나고자 달아날수록 발자국만 많아지고 그림자는 더 빨라질 뿐이다.


이때 그늘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어보라. 그림자는 사라지고 발자국도 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장자제물론.


그림자는 어둠의 일부다. 죽은 자의 영혼도 상징한다. 지하세계는 가장 어두운 곳이다. 거기서 영혼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그리스신화 얘기다.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간과할 수 없는 점이다.

그림자는 인간이 두려워하는 죽음, 불안, 두려움등을 나타낸다.


그림자의 의미는 확장성을 띤다. 해결하지 못한 난관이나 고통도 그것의 한 형태다. 돈 문제도 있다. 사람들은 이걸 해결하려다 진창에 빠지곤 한다. 에너지는 급속히 고갈되어 번아웃에 이르고 말지만.


설루션이 없을까. 만사를 제쳐놓고 그늘에 들어가 쉬면 된다. 문제의 그림자가 사라지니까. 바로 그때. 이것이 오늘 살펴볼 장자의 가르침이다.


지리산에 빨치산 루트가 있었다. 한국전쟁 전후에 게릴라들의 이동경로였던 것이다.


빨치산은 지리산의 산악지형에 매우 밝았다. 그 덕에 접근이 어려운 지대를 은신처 삼아 군사작전을 펴나갈 수 있었다. 은신처가 죄다 8부 능선 아래 있었다. 이 점이 흥미롭다.


8부 능선은 자동차의 브레이크장치와 같다. 능선 위로 드러나면 토벌대의 눈에 띄어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래서 멈춰야 했던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턱밑까지 쫓아왔어도 발자국을 조절할 수 있었다.


빨치산이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잔존할 수 있었던 비결. 그건 선을 넘지 않고 숨 고르기를 잘해서였다.



조선시대 명문가들의 교훈 하나가 있다. '3품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더 올라갔다간 당쟁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으니까 말이다.


지금 부귀와 영화를 한꺼번에 거머쥐는 스타영역이 있다. 정치 연예계 스포츠다. 가장 높은 고지에 올라 대중의 흠모를 받고 사는 현대판 귀족들이다.


세상엔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언제나 그렇다. 인기와 영예의 세례를 강하게 경험할수록 그림자는 위태위태하다.


 흠모로 가득 찬 대중들의 눈에선 예리한 광선이 뿜어 나온다. 시기와 질투의 레이저 광선이다. 레이저는 때때로 살상무기로 작동한다. 그래서 문제다.


8부 능선에 올라선 자는 포르노 배우처럼 발가벗겨질 각오를 해야 한다. 이 지대에선 예외도 비밀도 있을 수 없다.


 올라갈 땐 날개가 있지만 추락할 땐 모조리 꺾여버린다. 그것도 완전히. 안된 얘기지만 빨치산들한테 배울 게 있다. '과도한 선을 넘지 말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서라'.  


물론 앞으로 더 나갈 수 있다. 더 큰 성장도 가능하다. 이런 지점에서 멈추기란 쉽지 않다. 고도의 절제가 요구되는 것이다.


인기와 환호성의 에베레스트가 바로 앞인데 어떻게 그만두라 하는가. 그렇다면 워런 버핏과 찰리 멍거의 충고를 들어보자.


그들은 그래프가 널뛰듯 하는 주식시장에서 멈춤의 철학을 강조한 대가들이다.


단기적인 시장 변동에 반응하여 내달리지 말 것이 첫째요. 철저한 분석과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를 결정하라. 이것이 두 번째 요구사항이다. 둘 다 멈춤을 말하고 있다.


조선의 선비사회를 생각할 때 쉽게 떠오르는 콘셉트 하나가 있다. 유배다. 팔부 능선을 넘나들었던 고관들 가운데 이걸 피해 간 이들은 거의 없다.


인생이란 바람 부는 나무의 버들솜이요 들에 핀 꽃과 같다. 궁궐을 제 집 안방 드나들 듯하던 자들에게 이 교훈이 먹혔을까.


아귀다툼하는 정치판에선 돈키호테가 되어야 한다. 욕망의 그림자를 향해 돌진하는 일만 있으니까 말이다.


그들의 발자국을 정지시킨 복된 사건이 유배였다. 유배라는 그늘 속에 앉아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배자들 가운데 장수인들이 많았다. 모든 걸 내려놓았던 쉼의 시간 덕택이 아닐까.


 멈춤의 시간과 그늘이 없었다면 추사의 세한도나 다산의 역작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임금의 부름을 거듭 뿌리치고 오매불망 자연 속에 들기를 꿈꾼 인물도 있다. 퇴계 이황이 대표적이다.


스스로 강제적 유배를 단행한 것이다. 산과 강을 바라보며 권력의 그림자를 지우길 원했던 것이다. 퇴계는 도산서원의 그늘 아래서 다음의 글을 남겼다.

 

두세 가지 일로 마음을 여러 갈래 내지 말라. 오직 마음을 하나로 하여 온갖 변화를 살펴라.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어긋나지 말며 겉과 속을 모두 바르게 하라.


잠시라도 틈이 벌어지면 온갖 욕심이 생겨나 불 없이도 뜨거워지고 얼음 없이 차가워진다.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



세상을 사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철학자가 아니어도 다 안다. 살다 보면 마음도 몸도 지쳐 자신의 참모습이 위태로울 때가 찾아온다.


이 때는 뒤로 물러서서 그림자를 쉬게 하고 발자국을 멈추는 지혜가 필요하다.


으슥한 밤길을 걷다가 귀신에 홀렸다는 얘기는 여름밤에 듣던 단골소재였다. 전설의 고향 버전인 듯 하지만 언제 들어도 귀가 쫑긋해진다.


밤에 산을 타다가 길을 잃으면 무언가에 홀려 날이 새도록 길을 재촉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젯밤에 들어선 그 자리에 있는 것 아닌가. 죽도록 같은 장소를 돌고 돌았던 것이다. 도깨비에 홀린 듯.


왜 그랬을까. 어스름한 달빛에 드리운 자기 그림자가 너무나 무서웠던 거다. 그걸 보고 놀라 두려움에 쫓기면 일이 생긴다. 발자국은 과속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심장이 터질 듯 미치도록 달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쓰러지는 꼴이라니. 이런 일은 일상에서 반복된다. 자기가 만든 그림자 허상에 놀라 그것을 좇아 다녔던 것이다.


공황장애만큼 삶을 파괴하는 흉기도 없을 것이다.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지나 극단적 두려움의 정거장을 통과하면 공황장애라는 종착역이 나온다.


이 역에 도착하면 급격한 과호흡 증세가 일어난다. 지옥의 광풍이 몰려오는 시간이다.


 이 바람을 몇 번 맞으면 생명의 밑동까지 잘려나가는 처절함을 겪는다.


불안과 공포는 강도들이다. 허락 없이 영혼을 무단침범한 양아치들과 같다. 집에 들어온 도둑이나 강도를 곱게 상대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그냥 놔둬야 한다. 그러면 알아서 나간다. 잘 생각해 보라. 그놈들은 전부 내가 만든 그림자가 아닌가.


그림자를 지우려 미친 듯이 달리는 게 해결책이 아니다. 공황장애가 일어날 때 119를 불러 응급실로 직행할 일이 아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깊은 호흡을 하는 것이다. 이 순간 병원에 가도 이것밖에 할 게 없다. 호흡을 깊이 내쉬면서 다른 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숨이 거칠고 빠를수록 불안과 공포는 거세진다. 죽음의 먹구름이 나를 향해 몰려오는 것 같아 패닉상태에 빠진다. 나도 경험해 봐서 잘 안다. 미칠 것 같은 그 심정을.


깊은 심호흡에 멈춤의 비밀이 숨어 있다. 호흡을 컨트롤한다는 것은 그늘에 들어가 쉬는 것과 같다.


이때 그림자였던 강도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물론 적지 않은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렇다면 왜 호흡일까. 사람의 가장 깊은 부분을 가리켜 영 혹은 영혼이라 말한다. 이 단어들은 본래 숨, 바람, 호흡을 뜻한다.


이것이 성경전체가 강조하는 인간이해의 본질이다.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다. 그는 호흡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생각이 말이나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듯.


따라서 사람의 가장 중요한 기관은 곧 호흡이 된다. 생명은 호흡에 있는 것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물리적 생명은 종말을 고한다.


여기서 숨 쉰다는 것의 중요성을 깨우칠 수 있다. 바른 호흡이 마음의 쉼과 안정이라면 빠르고 거친 호흡은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이다. 호흡은 마음이 그리는 지도와 같다.


오래전 오스트리아의 빈에 간 적이 있다. 여행지에선 시간에 쫓기기 일쑤다. 그런 이유로 방문하지 못한 곳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에 간다는 말은 빈 껍데기 수수깡만큼이나 무가치해 보이지만 그걸로 위로를 삼는다.


내게는 '크로이츠슈타인'이 그런 곳이다. 빈에서 가자면 얼마 안 걸린다.



이 작은 마을에 보리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요놈은 마을의 명물이다. 날마다 음악애호가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작곡가 슈베르트가 생전에 이곳을 즐겨 찾았단다. 이 나무 그늘에 앉아 슈베르트는 쉼을 얻곤 했다.


돌아가는 길엔 음악적 영감을 담아갔다. 그의 걸작 '겨울 나그네'는 여기서 싹텄을 것이다.


성문 앞 우물가에 보리수 한 그루 서 있네

그 그늘 밑에서 단 꿈을 꾸었지

즐거우나 슬프나 내 마음을 위로했지


오늘 깊은 밤에 나는 이곳을 서성이네

어둠 속에서 두 눈을 꼭 감고


그때 보리수 나뭇가지가 손짓하며 내게 말하네

'친구여 오게나

그대가 쉴 곳은 여기라네'


한참을 그곳에서 빠져나왔건만

아직도 속삭임이 들리네


'그대가 쉴 곳은 여기라네'.


겨울나그네 가운데 보리수(Lindenbaum)

빌헬름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임. 1827년.


겨울 나그네는 극도로 우울한 노래다. 세상으로부터 상처 입고 실의에 빠진 한 젊은이가 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정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서 환청을 듣는다.


과거의 추억을 통과하면서 다가오는 보리수나무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쉴 곳은 여기라네'.


겨울 나그네는 외롭고 지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 영락없이 그 모습이다. 여기서 보리수나무는 안식과 평온을 약속하는 상징물이다.


우리가 쉬어가야 할 그늘이자 쉼터 말이다. 우리가 쉴만한 그늘, 보리수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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