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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Aug 09. 2024

외로움, 이거 어디다 쓰시렵니까?

이 어 령

내가 어렸을 때 굴렁쇠를 굴리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있지

정오의 햇볕 속에서 오솔길을 따라

혼자 굴렁쇠를 굴리는데 갑자기 울컥해지더라고.

눈물이 파악 흐르는데...

어린이에게도 영성이 있는 모양이야

존재의 근원적 슬픔 말이야.

이 어 령.


미국 캘리포니아에 수령 오천 년이 넘는 레드우드 삼나무가 있다. 나이만큼이나 그 속에 깃든 생명력에 경외감 마저 든다.


외로움은 레드우드 삼나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여기에 장기간 기대고 있으면 안 된다. 독한 벌레들이 기어들기 때문이다.


우울증 치매 불안장애 공황장애 무기력 등등. 이 놈들은 외로움의 고목을 찾아 둥지를 틀고 살림을 차린다. 그러다 가차 없이 공격해 온다.


외로움은 코로나 19의 깊골짜기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것이 종료된 이후엔 신종 전염병으로 자리를 굳혔다.


몇 년 전 영국과 일본에서 고독장관이 임명되었다. 인류역사 최초의 사건이었다. 남의 나라 일로 가볍게 봐안된다.


 머지않아 우리도 그렇게 될 것 아닌가. 외로움의 문제는 개인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국가적 차원에 속한 것이 되었고 글로벌 핫이슈로 뻗어나가고 있다.


외로움의 수원지는 어디일까. 외로움은 인류의 역사의 시작과 함께 나온 물줄기다. 구약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땅에 거주하더니.

창세기 4장 16절.


가인은 인류최초의 살인자다. 동생을 죽인 대가로 죄책감으로 시달리다 하나님을 등지고 훌쩍 떠나버렸다.


 생명의 뿌리가 되는 존재를 떠나는 순간 그 자리에 고독이 찾아든다. 자연계에 빈 공간이란 없지 않은가.


가인이 정착한 땅의 이름이 놋이었다. 방황 탄식 도망 등의 뜻을 가진다. 당최 호감가지 않을 이 어휘들은 가인의 삶이 어떠했는 지를 알려준다.



외로움은 가인이 놋땅에 들어가 맞이한 어두운 정서들과 맞닿아 있다. 가인 이후의 인간은 시쉬포스가 짊어진 무거운 바위돌처럼 운명의 짐이 되고 말았다.


고대의 사상가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주여 제 영혼은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불안합니다.


안식이 없는 인간. 그 자리에 외로움의 뿌리가 있다. 놋땅에 들어간 가인은 도시를 건설했다. 도시는 문명의 근간을 이룬다.


문명에 해당하는 영어 '시빌라이제이션 civilization'은 라틴어 '키비타스 civitas'에서 나온 말이다. 글자 그대로 하자면 '도시화'를 뜻한다.


문명은 호텔 레스토랑의 비싼 요리처럼 고급스러운 용어가 아니다. 그보다는 놋그릇에 담긴 질박한 비빔밥에 가깝다.


 문명이란 그냥 외로운 사람들끼리 모여 도시를 만들고 아옹다옹 사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문명이라는 공장은 찌꺼기이자 잉여물질을 배출한다. 외로움이다.


처음부터 도시 곧 문명은 외로운 사람들끼리 만든 유일한 서식지이자 인식처였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살아야 그나마 외로움의 쓴맛을 중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게 해소되는 건 아니지만.


이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그냥 외롭다. 혼자 있어도 외롭고, 둘이 있어도, 무리를 지어 있을 때도 외롭다.


 외로움이 정신과 신체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매우 크단다. 하루에 담배 15개를 피우는 것과 같은 효과라나. 기분이 매캐해지는 소리다.


무리와 떨어져 있으면 외로움의 강도는 심해진다. 현대인들은 고독사의 비극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무리를 짓고 사는 참새들처럼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시 편 102장 6~7절.


이 시편을 지은 저자는 수천 년 전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올빼미 부엉이 참새에 비유한다.


광야를 맴도는 올빼미, 황폐한 곳에 거처하는 부엉이,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이 새들의 공통된 분위기는 무엇일까. 외로움과 적막함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서와 정확히 겹친다. 도시 한 복판에서 사람들과 뒤섞여 살고 있지만 외로움의 그림자는 떠나지 않는다. 맑은 날 뿌연 운무가 뒤덮인 것처럼.


대한민국은 OECD 자살률 1위의 국가다. 보통의 문제가 아니다. 외롭고 우울해서 죽음에 이른다.


연민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부족한데 이제는 이런 이웃의 일에 무뎌져 산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끔찍한 비극인데도 말이다.


의사들마다 자살에 대한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야단이다. 이유는 갖가지 다르겠으나 그 뿌리는 하나가 아닐까. 외로움 말이다.


이제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다루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구호는 21세기에 와서는 고쳐 써야 한다. '외로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사람들한테 시달려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대단한 멘털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집 나간 토끼 몇 발자국 못 간다.


자연을 안식처로 삼아 살자면 낮에는 뱀과, 밤에는 귀신과 친구로 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보다 한층 더 어려운 과제가 버티고 있다. 외로움이다.


대개 이걸 못 이겨 도시로 컴백한다. 인간의 본능 아닌가. 사람만큼이나 외로움을 타는 동물이 개들이다. 그래서 개도 우울증 약을 먹는다.


사람과의 교감이나 사랑이 부족해지면 개는 금방 생기를 잃고 우울감과 외로움에 빠져든다. 사람이나 개나 살기 힘든 세상이다.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나무의 일생의 지도가 나이테 안에 들어있다. 인간은 외로움의 나이테를 그리며 한평생을 살아간다.


어머니 뱃속에 있던 태아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처음 마주치는 얼굴은 잔인하게도 외로움이다.


 

작가 이어령이 어렸을 때 느꼈던 외로움의 경험은 그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다. 정오의 햇살이 그토록 찬란하게 비치고 있었건만 왜 그는 외로움의 눈물을 흘렸을까.


정오의 햇볕 속에서 오솔길을 따라

혼자 굴렁쇠를 굴리는데 갑자기 울컥해지더라고.

눈물이 파악 흐르는데...


우리는 이 눈물에 공감할 수 있다. 이어령이 이때 흘린 눈물, 그 외로운 감성은 훗날의 대작가를 만든 발판이 되었다.


 외로움은 이어령에게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킨 모멘텀이 되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외로움이란 정서는 가치중립적이다. 뭐 딱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란 말이다. 어떤 방향,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다.


외로움을 부정적으로만 파고들면 절망과 죽음으로 이끄는 파멸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긍정적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면 창조적 에너지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오늘날 대세로 자리 잡은 문학적 장르는 에세이가 아닐까 싶다. 에세이 하면 금방 몽테뉴가 떠오른다.


그가 남긴 불멸의 대작 '에세'는 스스로 만든 지독한 외로움의 성 안에서 탄생했다.


정치에 치이고 질병에 시달린 그는 몽테뉴성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고 걸작을 출산하는 산고를 거쳤던 것이다. 은둔과 외로움은 몽테뉴로 하여금 창조를 가능케 한 스승이었다.


로마시대의 전설들로 남은 두 인물은 단연 키케로와 세네카다. 저들이 유배의 고독을 거치지 아니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위대한 작품을 낼 수 있었을까.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 단테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 모두 오랜 시간 고향에서 쫓겨나 타국을 전전하며 고독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것이 자양분이 되어 불멸의 작품을 탄생시키지 않았는가.


다산 정약용은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 불린다. 십팔 년의 유배기한을 하늘이 자신에게 준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절치부심하여 불후의 대작을 남겼다.


그의 유배지에서의 고통과 외로움이 우리에게 큰 축복을 가져다준 것이다. 다산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바닷가 강진 땅에 귀양을 왔다. 그래서 혼자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배움에 뜻을 두었지만 스무 해 동안 세상길에 잠겨.... 이제야 여가를 얻었구나. 그러고는 스스로 기뻐하였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명필 가운데 이광사라는 인물이 있다. 그 역시 다산처럼 고통스러운 귀양살이를 보내야 했다.


 외로움에 찌든 그는 귀양지에서 박에다 글을 담아 세상을 향해 띄어 보내곤 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면서 말이다.


이광사는 귀양지에서 끝내 나오지 못했다. 그저 쓸쓸히 죽어 잊힌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유배지에서의 절망과 외로움. 두 사람은 똑같은 상황을 맞이했으나 마지막은 달랐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았을까. 생각과 가치관의 차이였다.


그 결과 외로움의 사용법이 달랐던 것이다. 외로움을 이기는 양약은 다름 아닌 긍정적 사고에 있다. 어떤 일이든 바른 생각과 해석이 중요하다.


원자력이 악한 용도로 쓰이면 인류전체를 섬멸할 핵무기가 된다. 그러나 선한 용도로 쓰면 풍성한 에너지 자원이 될 수 있다.


외로움도 그렇다. 사용법에 따라 얼마든지 창조적 자원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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