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올림픽
2010년 겨울, 밴쿠버는 거대한 축제의 전시장 같았다. 밴쿠버에서 스키 명소 위슬러까지 이어지는 ‘Sea to Sky’ 하이웨이가 말끔히 단장을 마쳤고, 다운타운에는 선수들의 보금자리인 올림픽 빌리지(Olympic Village)가 위용을 드러냈다. 세계인의 축제인 동계 올림픽의 서막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도 들뜨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콩나물과 두부를 만드는 공장에서 주 4일을 일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민자였다. 예년에 비해 포근하다지만 겨울의 새벽 공기는 여전히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콩나물을 씻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업장 안에서 두부 포장을 돕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500g 남짓한 두부 천여 개를 자동포장 컨베이어 벨트에 올리고, 콩나물이 초록색으로 변하지 않도록 늘 어둑한 불빛 아래서 수백 박스의 포장을 마쳐야 했다. 고된 몸을 잠시 쉬며 동료들과 나누어 먹던 간식과 점심, 그리고 식후에 마시는 노란 봉지의 믹스커피 한 잔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서로 힘든 일을 더 하려다 엉덩이를 부딪치며 웃음꽃을 피웠고, 인심 좋은 사장님 내외분이 오시는 날엔 휴식도 먹거리도 더욱 푸짐해졌다. 돌이켜보면 고단함 속에서도 즐거운 웃음이 끊이지 않던, 서로가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일했던 참 따뜻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삼성전자 직원 40여 명이 밴쿠버 인근 써리(Surrey)에 머문다는 소식과 함께, 그들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쉐라톤 호텔 메인 셰프의 제안이 들려온 것이다. 요리라곤 집과 교회에서 밥과 반찬을 만든 게 전부였지만, 타국에서 만나는 고국 사람들에 대한 반가움 하나로 덜컥 그 일을 맡기로 했다.
콩나물 공장 사장님은 두부와 콩나물을 아낌없이 내주셨다. 친구와 나는 정성을 다해 식단을 짰다. 마침 정월 대보름이 끼어 있던 날엔 찰밥과 삼색 나물을 준비했고, 콩나물과 두부 요리에 들깨가루를 듬뿍 넣은 북엇국을 끓여 냈다.
“지금까지 먹어본 북엇국 중에 단연 최고예요.”
호텔에 머물던 이들의 후한 평 한마디에 며칠간의 긴장과 분주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주방에서 나는 이민자라는 이름의 또 다른 국가대표가 된 기분이었다.
마지막 음식을 전달하고 돌아온 뒤, 나는 곧바로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붉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김연아 선수의 프리스케이팅 파이널 경기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부엌의 열기에서 벗어나, 이제는 응원의 열기 속으로 뛰어들 차례였다.
집에 TV가 없던 나는 한인들이 모인 ‘코리아 플라자’로 향했다. 웅성거림과 긴장감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드디어 대한민국 김연아 선수가 빙판 위에 섰다. 음악이 흐르자 공간은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고요해졌다. 점프 하나에 “아—!” 하는 숨 멎음이, 회전 하나에 “됐다!” 하는 확신이 교차했다. 마지막 포즈가 끝나고 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화면에 점수가 떠오르는 순간—
“고 김연아! 고!”
“대한민국!”
폭발적인 함성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서로를 끌어안는 사람들, 눈물을 훔치는 얼굴들. 붉은 옷을 입은 우리는 그 순간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잊고 기쁨으로 하나가 되었다.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확정 짓던 순간의 환호는 파도처럼 우리를 덮쳤고, 나는 그 거대한 감동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민자의 삶은 때로 척박하고 고단하다. 하지만 2010년 그 겨울, 콩나물 공장의 하얀 김과 북엇국의 구수한 냄새, 그리고 목이 터져라 외치던 응원의 함성은 지금도 내 안에서 각별한 기억으로 살아 숨 쉰다.
본래 동계 올림픽은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빙상과 설상, 슬라이딩 경기를 중심으로 조용히 첫발을 떼었다고 한다. 작은 겨울 축제로 시작된 이 걸음은 시간이 흐르며 전 세계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거대한 무대로 성장했다. 이제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평화와 경쟁, 자부심과 뜨거운 논쟁까지 품어내는 인류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2026년 지금, 이탈리아 밀라노와 코르티나담페초에서는 또 하나의 겨울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세상은 유난히 소란스럽고 굵직한 사건 사고들로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지만, 그 소음 너머에서도 얼음 위를 가르는 스케이트 날의 날카로운 울림과 설원을 질주하는 선수들의 거친 숨 가쁨은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멈추지 않는 도전이 온전한 격려 속에 빛나기를 응원해 본다.
유튜브에 올라온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며 나는 다시 밴쿠버의 그 새벽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얼음 위에서 역사를 쓰고,
누군가는 부엌에서 고향의 맛을 끓이고,
누군가는 목이 터져라 외치며 한마음이 되었던 그 찬란했던 날을.
지구촌의 축제 속에 한 그릇의 북엇국과 빨간 티셔츠로 남겨진 이민자로서의 기록. 그것은 우연히 찾아와 필연처럼 남은, 내 인생의 특별한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