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도둑

월담하던 김치 도둑, 40파운드 배추 여전사가 되다

by 도린


​부엉 부엉새가 우는 깊은 밤,
언니, 오빠, 동네 친구들이 한 방에 모였다.
“가위바위보! 대대엔 찌~!”
지는 순간 끝장이다.
패자는 그 즉시, 어둠을 뚫고 담을 넘는

‘김치 특공대’로 임명된다.


​꽁꽁 언 장독대 뚜껑을 열고

겹겹이 덮인 비닐을 걷어내면,
시푸르 딩딩한 겉잎 속에 숨어 있던

‘시뻐얼건’ 김장김치가 자태를 드러낸다.


양푼이에 담아 냅다 토낀 뒤

아랫목에서 영접하는 그 맛이란.
김 모락모락 나는 고봉밥 위에

알싸한 놈을 쭉 찢어 척— 걸치면,
양 볼이 터져라 밀어 넣던 그 순간

우리들의 겨울밤은 후끈하게 익어갔다.


​그땐 몰랐다.
김치는 당연히 엄마가 무한 리필해 주는

‘기본 옵션’인 줄로만 알았다.
​결혼 후에는 선택지가 더 넓어졌다.
친정 표, 시댁 표, 교회 여전도회 찬스까지.
내게 김치는 거의 ‘배스킨라빈스’ 급이었다.
오늘은 친정 엄마 맛, 내일은 시어머니 맛.
31가지는 아니어도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한,
나는 그저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행복한 소비자였다.


​그런데, 낯선 땅으로의 이민이

나를 ‘김치 여전사’로 거듭나게 했다.
이제 주말 세일 전단만 봐도 눈이 자동 확대된다.
40파운드 배추 박스를

쌀가마니처럼 번쩍 들어 카트에 싣고 오면
그때부터 거실은 전장이 된다.
​양파, 무, 대파 총집합.
찹쌀풀과 멸치액젓 콸콸콸 붓고,
마늘과 생강을 듬뿍 갈아 넣는다.
귀한 국산 고춧가루까지 과감히 투하!
두 팔 걷어붙이고 버무리다 보면

허리는 휘청이고 손등은 얼얼해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승전가가 울려 퍼진다.


​아, 이게 바로 ‘엄마’라는 포지션이었구나.
​갓 담근 겉절이에 야들야들한

수육 한 점 올리는 날이면
가족들의 눈빛부터 달라진다.
캠핑장에선 등갈비 김치찜 하나로

밥도둑 검거 완료.
밥솥 바닥이 보이는 속도는

그야말로 광속이다.


​이제 김치는 몰래 넘겨보던

담벼락 너머의 유혹이 아니다.
어느새 직접 담가 푸짐하게 나누고,
엄마의 투박한 손길을 닮아가는

나의 ‘인생 레시피’가 되었다.


​언젠가 시집간 딸아이의 냉장고에도
내가 만든 김치가 떠억 하니 자리 잡고 있겠지.
그날을 상상하며 다짐해 본다.
잘 익은 김장김치처럼,
속은 깊게, 배짱은 두둑하게,
그렇게 멋지게 익어가겠노라고.


한국배추로 담근 김치와 북어국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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