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임종과 장례식으로 사 남매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같은 엄마 밑에서 자란 자식들이지만, 기억 속 엄마의 모습은 저마다 조금씩 달랐다.
특히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큰언니와 막내인 나 사이에는 간극이 컸다.
군불을 지피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밥을 짓고, 빨래를 하던 언니의 아날로그 시절과
연탄불이 아궁이 옆에 들어서고, 우물가에 수도관이 설치되던 나의 하이브리드 시절은
마치 흑백 TV와 컬러 TV만큼이나 거리가 멀었다.
내가 국민학교 삼사 학년쯤 되었을 때, 언니는 벌써 시집을 갔다.
그러니 엄마에 대한 기억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사 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큰언니와의 추억도 많지 않았다.
세월은 흘렀고, 나도 가정을 꾸리고 이민자가 되어
부모님의 소식을 언니를 통해 듣는 일이 잦아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의 건강은 급격히 기울었고
언니 집에서 지내게 되셨다.
그때부터 내게 ‘친정’은 자연스레 큰언니의 집이 되었다.
한 해, 두 해.
한국 방문이 쌓일수록 언니와 나 사이엔 묵직하고도 다정한 정이 켜켜이 쌓여갔다.
밤이면 엄마의 굽은 허리와 주름진 손을 떠안듯
언니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옛 기억들을 꺼내며
서로의 굴곡진 삶을 조용히 가슴에 담았다.
정 많고 손 큰 언니는
한국에 올 때마다 꼭 이것저것 챙겨줘야 직성이 풀린다.
나의 요리솜씨의 팔 할은 언니 덕분이다.
미숫가루, 된장, 고춧가루, 참기름, 흑임자가루, 볶은 참깨...
방앗간을 하는 덕분에 양념이며 먹거리를
가방이 미어져라 싸준다.
그렇게 언니는 어느새 내게
엄마 같은 존재가 되었고,
나는 언니 바라기가 되었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뒤 언니가 물었다.
“니 이제 엄마 아부지 안 계신다꼬 한국 안 올 낀가?”
나는 펄쩍 뛰며 말했다.
“천만에, 엄마 아부지는 안 계셔도 언니가 있는데 우째 안 오노.
일 년에 한 번은 꼭 올 기다.”
언니는 고마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얼굴 보고 왕래할 수 있는 시간도 한때고, 반짝인기라.”
엄마 없는 첫 한국 방문이 다가온다.
아직은 상상이 안 된다.
그래도 큰언니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언니야,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자주 보자.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