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저기도 짙붉은 감자밭이었다. 이미 수확은 끝났고 비어진 밭은 따뜻한 숨을 내뿜으며 ‘이제 다 했다’는 듯 쉬고 있었다. 캐나다 동부의 작은 주,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그곳의 10월 풍경이었다. 주홍빛 석양은 대서양 위로 내려앉고 낯선 땅의 기운이 나를 감싸던 철줄을 끊어냈다.
대학 캠퍼스에서 빛날 청춘들이 토플 책을 옆에 끼고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며 점점 반짝임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길을 따라갈지도 모를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딸들의 미래에 조바심이 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딸들에게 물었다. “다른 나라에서 공부해 볼래?” 무작정 차에 태우고 떠났던 엄마의 방랑기 때문이었을까. 딸들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 그래보지 뭐!” “OK!”
무모한 결심에 놀란 동료들이 마련해 준 환송회에서 후배가 물었다. “왜 캐나다로 가세요?” 나는 대답했다. “지도에서 영어권 나라를 찾았어. 미국은 총이 많아 민경이가 꺼렸고 영국과 호주는 섬이라는 답답함이 있었지. 남은 건 캐나다였어.” 캐나다 여행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후배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6개월 뒤, 지현이, 민경이와 함께 캐나다로 떠났다. 사실 그 선택에는 더 깊은 계기가 있었다. 암 진단이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서늘한 방 한가운데, 좁고 차가운 스테인리스 침대에 석고처럼 누워 암세포를 정조준해 빛을 내리쬐는 기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5분은 미라가 되는 시간이었다. 옆구리가 가려워 손이 근질거렸다.
그 시간을 버티려는 내 영혼은 자율성을 빼앗긴 육체를 떠나 얼마 전 여행했던 곳으로 이동했다. 깃털처럼 가벼워져 일본 규슈의 두 둔덕 사이의 곧게 뻗은 2차선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에 옆에 있던 친구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일어나세요.” 방사선사가 말했다. 다행히 그 자세 그대로 5분이 지났다.
학교로 돌아온 후에도 실험실 약품 냄새 속에서 차갑던 5분의 기억은 반복되었다. 그때 나는 “타인은 법정이다”라는 문장 속에 갇혀 살고 있었다. 타자의 관심은 나를 재단하는 판결이었고, 변명조차 허락되지 않는 집요한 시선이었다. 나조차도 딸들에게 “너희를 위해서”라는 말로 그 버거웠던 시선을 들이밀고 있었다. 날마다 내 삶은 어딘가에서 삐걱 소리를 냈다.
죽음을 직면한 뒤,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이 전부다.’는 명제를 얻었다. 어쩌면 엄마가 딸들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 일 자체가 오만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미래를 살아갈 테니까. 바람이 생겼다. 살아가면서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5분을 견뎌내는 장면 하나. 그리고 그 순간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졌으면 했다. 적어도 그때의 한국에 짙게 깔려 있던 호두 껍질 같은 편견을 깨는 것보다는, “가볍게 춤추듯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가길 바랐다. 나는 그 가능성을 딸들에게 건네주고 싶었다.
태평양을 건넜던 환희보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과 강에,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오래 머무는 나이가 되었다. “왜 그렇게 낯선 곳으로 떠났어요?” 누군가 다시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겠다. “나의 세계를 바꾸고 싶었어요.”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해서는 환경도, 세계도 달라져야 했다.
처음 마주했던 PEI의 붉은 들판처럼, 내게 슈필라움은 자유롭게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여백이었다. 그 여백에 나를 맡겼다. 견뎌낸 5분은 그렇게 나의 슈필라움이 되었다. 그 짧은 시간은 내 삶을 바꾼 가장 중요한 단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