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다 걸어볼 작정이다.

1코스, 19코스, 21코스

by 에우름


거실 앞 작은 동산에도 지난 가을을 닮은 빛이 다시 채색되었다. 사람 드물어 한산하게 살던 캐나다 촌놈은 에너지 넘치는 한국에서 잠시 놀러온 사람답게 바쁘고 즐겁게 지냈다. 보고픈 전시회에 들떠 여기저기 달려갔고, 일본의 미술관에도 틈틈이 찾아갔다. 멀리서 그리웠던 이들과 반가운 시간도 보냈다. 하지만 그 즐거움에도 요즘은 자꾸 가벼운 적적함이 그리워진다.


서랍 속에 여러 겹의 옷들이 꽉 들어찬 느낌. 나에게는 한 칸쯤 비어 있는 서랍이 필요했다. 소박한 관계와 한적한 공간이 이미 내 몸에 배어서일까. 그래서 나는 제주도, 잠시 틈새 숨을 쉴 수 있는 올레길에서 작은 모험을 시작했다.



며칠 전, 올레길 세코스을 완료했다. 오랜 벗과 함께 바닷길을 걸으며 신선한 공기로 머리와 마음을 훑어냈다.

바람을 맞으며 나란히 걷는 이 동행도 참 값지다. 이 추억은 언젠가 내 시간을 따뜻하게 덮어줄 테니.


초짜 올레꾼인 나는 약지 발가락 껍질이 홀라당 벗겨져 쩔뚝거리면서도 시작점, 중간점, 마지막점에서 각기 다른 스탬프를 파란색 올레 여권에 꾹꾹 눌러 찍고 간세 앞에서 사진을 남기며 괜스레 큰일을 해낸 듯 기분이 좋았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흰머리를 면수건으로 질끈 묶고 멀리 성산일출봉과 거센 파도 위에 떠 있는 해녀들의 주황색 부표에 시선을 던졌다. 말미오름과 서우봉에 올라 해안선에서 장난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낮은 돌담으로 나뉘어진 당근밭과 열무밭을 바라보았다.



문득, 글쓰기와 올레길이 겹쳐 보인다. 저 멀리 깊은 곳으로 시선을 보내며 곁에 있어 주는 이들과 늘 함께하듯 다가오는 자연을 떠올린다. 거센 맞바람에 초개처럼 흩날리던 생각들을 조용히, 담담하게 정돈하는 과정. 올레길 걷기는 또 다른 글쓰기가 되었다.


도착한 날 늦은 밤, 친구는 몇 주 후의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놓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다시 가자.”



가까운 지인이 떠나기 전 말했다.

“걷다 힘들면, 길가 해삼 파는 작은 좌판에서 오도독 해삼에 한라산 소주 한 잔 하고, 택시 타고 호텔로 가도록 해.”


‘이런!’ 나를 꽤나 미덥지 않게 본 것이다. 그래도 한때는 대학 산악부에서 지리산 노고단을 뛰어다니던 사람인데…. 할머니가 되었다고, 이런 말을 반박조차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니.


올레길은 27코스가 있다. 이번에 세 코스를 걸었으니,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 완주하려면 3박 4일 일정으로 여덟 번은 더 제주를 찾아야 한다. 그럴 시간도,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생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좋다. 해삼집에서 소주 한 잔 하고 택시를 타더라도—나는 끝까지 걸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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