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 힐링 담론: 첫사랑
"로니야! 너, 소개팅할래? oo 대학교 2학년, 참 너랑 같은 학교 오빠인데 지금 군 복무 중이야."
1999년 3월 어느 날,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뭐? 군인? 야, 너 내가 군바리(군인)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
나는 군인이라는 말에 다짜고짜 화를 냈다.
“워워,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이 오빠가 이제 제대 한 달 남았다는 거야. 그러니까 곧 민간인이란 말이지. 이번에 말년 휴가 나왔다니깐. 내가 이 오빠 알고 지낸 지 몇 년 됐는데 정말 괜찮아. 너 왜 교회 오빠 스타일 좋아하잖아. 비주얼이 딱 그래. 잘만하면 이번에 … 맞다! 그래 네 로망 c.c가 될 수도 있어.”
친구는 나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따발총을 쏘아대듯 자기 말만 늘어놓았다.
"야! c.c 는 뭐 아무나 하는 줄 알아?”
“진짜야! 로니야, 장난 아니고 이번엔 촉이 좋아.”
“음… 만날 그놈의 촉. 그래도 교회 오빠라니… 그건 좀 괜찮네. 그러니까 진짜 말년 휴가란 말이지?”
“아, 그렇다니깐!”
“그럼, 생각 좀 해볼게.”
“야, 생각은 무슨? 나만 믿고 따라와.”
대학 새내기 시절 나는 아름다운 캠퍼스를 배경으로 c.c를 꿈꿨다. 멜로 영화에서 본 것처럼 자석 같은 이끌림으로 첫사랑을 만나겠다고 친구들에게 떠들어대기도 했다. 하지만 꽃 같은 청춘은 그냥저냥 흘러만 갔고 그 흔한 로맨스 한번 없이 어느새 나는 3학년이 되었다.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남자들은 있어도 눈에 들어오는 남자가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동기는 아기 같고 선배는 삼촌 같았다.
이번이 얼마 만의 만남인지 모르겠다. 갈색 긴 생머리가 봄바람에 휘날리도록 풀어헤쳐 볼까 아니면 우아한 목선이 잘 드러나게 머리를 틀어 올려볼까? 치마를 입을까 바지가 나으려나? D-day를 잡아놓고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할 비장의 무기로 뭐가 좋을지 나는 완벽한 소개팅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매일 밤 잠자리에 들었다. 나의 로망 c.c를 꿈꾸며.
며칠 뒤, 약속했던 날이 왔다. 나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검은색 왕 리본 핀을 꽂았다. 앞머리는 한 올의 흐트러짐이 없이 옆으로 빗어 넘긴 뒤 강력 스프레이를 뿌려 이마에 딱 붙였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정 플레어 치마를 입고 상큼하게 청재킷을 걸쳤다. 그리고 현관으로 나가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신었다. 며칠 전 시내에 나갔다가 유행이라며 산 앞코가 길고 뾰족한 구두였다.
‘음, 역시 나란 여자. 완벽해. 오늘 소개남도 나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겠군.’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옷깃을 가다듬으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대구 시내 번화한 거리에 도착했다. 동성로 거리는 요란한 음악 소리와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스치듯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 힐끔힐끔 나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늘은 맑았고 시내 가운데 어느 리어카에서는 최신가요가 팡파르처럼 사방에 울렸다. 나는 마치 레드카펫 위를 걷듯 설레었다.
길을 걷다 어느새 약속한 장소에 다다랐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그 어떤 영화 제목이었던가 ‘하필 처음 만나는 장소가 미워도 라니 이름도 얄궂다’라는 생각을 하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은 조용했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당연히 먼저 와 있을 줄 알았던 소개남이 없었다. 한 테이블 정도 손님이 있었고 다른 테이블은 비어있었다. ‘소개팅에 소개녀가 먼저 와서 기다린다?’ 나는 창가 쪽으로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아 서운한 마음을 감추려 거울을 꺼냈다.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기색으로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소개남이었다. 조금 마른 체형에 청바지와 흰색 티셔츠, 빈폴 카디건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친구의 말대로 교회 오빠 분위기가 났다. 그는 햇빛에 약간 그을린 듯 구릿빛 피부색에 안경을 쓰고 있었고 스포츠머리보다 조금 긴 머리카락은 제대를 알리는 표식 같았다. 우리는 어색함 속에서 짧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로니씨인가요?"
"네, 안녕하세요."
"저, 제 친구도 같이 왔어요. 합석 괜찮죠?”
“네? 아, 네….”
소개남은 예고도 없이 그의 친구를 데려왔고 나는 얼떨결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세명이 마주 보고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던 중이었다. 함께 온 소개남의 친구가 꾸벅꾸벅 조는가 싶더니 급기야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서는 대놓고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저… 친구분 주무시네요.”
나는 곁눈질로 소개남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 어제 제가 휴가 나왔거든요. 이 친구와 늦게까지 좀 마셨어요. 그래서 피곤했나 봐요. 제가 소개팅한다니 궁금하다고 따라오긴 했는데.”
“네….”
‘아니, 피곤하면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주무시지. 남의 소개팅 자리엔 왜 따라와서 무슨 짓이람. 괜찮은 오빠는 개뿔.’
나는 튀어나오려는 속마음을 꾹꾹 누른 채 주선해 준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생각해서 한 시간만 버티기로 했다. 시계는 고장 난 듯 참 느리게 갔다. 벚꽃들이 핑크로 물들기 시작한 황금 같은 주말 오후 나의 소개팅은 짙은 회색빛이 되었다.
서로 어긋났던 첫 만남 후 그는 연락도 없이 군대로 복귀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제대 말년의 무료함 때문이었는지 어쨌는지 어느 날 도서관에 있는데 대뜸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소개남은 대대장 운전병이었기에 일정에 따라 가끔 외출을 나왔던 것이었다. 의외였다.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깜짝 데이트에서 오묘한 감정이 느껴졌고, 그가 삐삐에 남긴 번호며 음성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아는 선배로만 알고 지낼까 싶었다가 언제부턴가 소개남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소개팅 날은 괄호 밖이던 그가 점점 반전 매력을 발산해 냈다. 나는 소개남의 리드와 스위트 함이 싫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친구가 말한 괜찮은 남자 같아 보였다. ‘미워도 다시 한번’ 그 간판의 이름값일까? 다시 보니 그는 마치 반짝 빛나기 전 원석 같았다.
2008년 가을, 나는 시월의 신부가 되었다. 9년 연애사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그와 함께 같은 캠퍼스 식당에서 날마다 밥을 먹고 벚꽃을 보았다. 만난 지 천일 되던 날 천 마리의 학이 아니라 삼 천마리 백조를 접어 유리병에 담아 선물하던 그 남자. 공대에서 사회대를 오가며 가끔 대리 출석을 해주던 그였다. 그는 내가 먼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던 때, 서류 응시 날이며 면접 날에도 자기 수업은 뒷전이고 나를 따라와 응원해 주었고 내가 직장을 다닐 때는 매일같이 퇴근길 운전기사가 돼주었다. 그와 함께한 9년이 하루처럼 짧았다.
나의 첫사랑 그는 바로 남편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 얘기지만 남편은 청재킷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었다. 올림머리와 코가 뾰족한 마녀 구두 역시 평소 싫어하던 패션이었단다. 두 아이의 부모가 된 지금도 가끔 지난 연애사를 꺼내면 첫인상은 별로였다고 서로 토닥거리곤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늘 손해 같았던 스물 하고도 세 살 나의 길고 긴 첫사랑.
9년 전 어느 봄의 그 캠퍼스. 구내식당과 도서관. 영화관이며 노래방. 시내 어느 거리. 우리의 추억들은 잘 계시는지? 오늘, 나는 그간 일부러 입지 않았던 청재킷을 꺼내 입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