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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니의 글적글적 Feb 09. 2023

설거지가 제일 싫은 전업주부

마흔 살 힐링담론: 내가  싫어하는 일



주말 저녁, 모처럼 거실 소파에 누워서 소설책이나 보고 있으려는데 주방에서 작은 아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엄마, 컵?”

“응? ….”

“엄마, 컵이 없어.”

"그래?”

나의 눈은 소설책 어느 페이지에 박혀있었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엄마, 물! 어디에 마셔?”

“뭐, 아무 데나 마셔.”

아이는 콕 집어 달라는 듯 집요하게 대답을 졸랐다.

“엄마, 아무 데나 어디?”

나는 어쩐지 말꼬리 잡듯 계속 이어지는 아이의 장난기 가득한 질문에 약이 오르던 참이었다.

“아.... 거기 밥그릇 있잖아. 이제 엄마 부르지 마!”

나는 뚱한 목소리로 대꾸하고 소파 반대편으로 돌아앉았다.  

    

잠시 후.

“저기요, 아줌마!”

“뭐? 아줌마? 이 자식이! 아줌마라니!”

“아줌마 맞잖아!”

잘못 맞은 탁구공처럼 삐딱한 말이 돌아왔다.

“야!”

나도 지지 않으려 살벌한 고함으로 아이에게 맞받아쳤다.


“왜~에? 엄마가 엄마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그러니깐 아줌마지. 컵 달란 말이야.”

"어이구, 진짜! 거기 식세기 안에 그릇 없어? 밥그릇 있잖아. 컵 없으면 그릇에 마시면 되지. 컵이 없으면 밥그릇에. 밥그릇 없으면 국그릇에 마시든가! 아무 데나 먹으라고… 됐냐? 열 살인데 물 하나도 못 마시고. 쯧.”

나는 아이를 향해 잔소리 폭격을 날렸다. 아이는 냉랭해진 말투에 그제야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폈다.    

 




안마의자에서 한가롭게  유튜브나 들여다보며 휴대전화 삼매경에 빠져있던 남편은 그제야 분위기 파악이 되셨는지 엉덩이를 들썩이며 일어났다.

“아이고, 자! 드디어 비장의 무기가 나올 타임이구먼.”

남편은 실실 웃으며 다용도실로 가더니 종이컵 뭉치를 겨드랑이에 끼고 나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스레 종이컵에 씌워진 비닐을 뜯어 정수기 옆에 놓아두었다.

“성지야, 이제 이걸로 마셔.”

남편의 말이 끝나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종이컵 하나를 뽑아 들고 정수기로 다가갔다.   

   

“뭐… 보아하니 쓸만한 밥그릇도 없는데? 오늘따라 엄마는 왜 이리 예민하시나?”

아이가 무사히(?) 물을 마시는 것을 확인한 뒤 남편은 싱크대 안에 높이 솟은 설거지 산을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그 소리가 왠지 ‘설거지 안 해놓고 애한테 큰소리냐’라고 들리는 것 같아 마음에 거슬렸다.      


그것은 물컵이 쏘아 올린 설거지 전투의 서막이었다.

“아, 그럼 당신이 설거지 좀 하시던가?”

아이에게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이 이번엔 남편한테 날아갈 참이었다.

“식기세척기 있잖아.”

남편은 싱크대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식세기는 뭐 혼자 돌아가나? 주말엔 아빠가 설거지 좀 도와주고 그러면 좋잖아. 아니지. 이게 도울 일이야? 친구 신랑들은 말 안 해도 알아서 척척하더구먼. 당신은 뭐.”


나는 우리 남편 주위에는 눈 씻고 봐도 없다는 그놈의 친구 신랑을 데려와 성난 벌처럼 남편에게 쏘아댔다.

“아, 왜, 또 또. 나한테 화살이 날아오냐? 성지 어디 갔지? 성지야!”

순간 남편은 위험신호를 감지한 듯 딴청을 피우더니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럴 땐 일단 피하고 보는 게 국룰이란다.     






나는 설거지가 제일 싫다. 덕분에 우리 집 식탁에는 종이컵과 나무젓가락이 등장할 때가 종종 있다. 설거지가 수북이 쌓일 때 나오는 히든카드라고 할까?      

나는 음식을 하는 건 그럭저럭 괜찮은데 설거지할 때면 유난히 예민해졌다. 주말이 되면 긴장의 끈이 풀리는지 더 그랬다. 

식사 시간이 끝나면 치우는 일은 되도록 미루고 싶었다. 눌어붙은 냄비, 기름 가득 먹은 프라이팬, 물 한번 먹을 때마다 쌓이는 컵, 아무렇게나 어지럽혀진 싱크대. 남들은 설거지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는데, 나는 화가 툭 튀어나온다.     


설거지. 결혼 후엔 나만 하라고 정해 놓은 것도 아닌데 암묵적으로 내 일이 되었고, 그것을 하지 못하면 스트레스였다. 정리된 것을 좋아하지만 치우는 것은 싫어하는 나.

매번 정리하고 가스레인지와 싱크대를 닦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매일 반복되는 이 일은 티도 나지 않고 그만한 가치도 없어 보였다. 식사 후 모두 편하게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나만 혼자 밤늦게까지 싱크대 앞에 붙어있으면 나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콩쥐나 신데렐라가 된 것 같은 생각에 내 처지가 가엾기도 했다.


신세계라며 남편이 들여온 식세기 이모님도 설거지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지 못했다.          

미루고 미루면 더 싫어지는 설거지.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

매일 하루 집안일의 끝.

나는 언제쯤 기분 좋은 씻기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까? 그러면 애꿎은 가족들에게 꼬장 부릴 일이 없을 텐데 말이다.


지금도 정수기 옆에는 층층 쌓인 열 개의 유리컵이 나를 향해 손짓한다.

오늘 밤, 싱크대 앞에 섰을 때 내 마음에도 설거지를 대하는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나길 바라본다.






사진© Hans,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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