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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여름, 다른 미역국

그 맛 알지? 맛있는 음식 이야기: 미역국

by 로니의글적글적



6월의 어느 오후, 주방 공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창문을 활짝 열어도 시원함은커녕 뜨거운 바람 한 덩이가 훅 밀고 들어온다. 선풍기 날개는 강하게 돌고 있지만, 뜨뜻미지근한 바람에 몸속 수분만 쪽쪽 말리는 기분이다. 현재 기온은 33도.


폭염 한복판에서 나는 지금 냄비 앞에 섰다. 작열하는 가스 불꽃 앞에서 신경이 곤두선다. 여름 더위에 서서히 적응도 할 겸, 전기세도 아낄 겸, 지구도 살릴 겸해서 에어컨은 7월부터 틀자고 내가 먼저 가족들에게 선언한 터다. 문제는,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이 더운 주방에서 성능 좋은 냉방기구를 두고 지금 무언가를 끓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이지, 이건 고역이다. 하물며 그게 오래 끓일수록 맛이 좋은 국물 요리라면, 더더욱.

오늘 저녁 메뉴는 미역국이다. 둘째가 태어난 날이니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가족 누구도 생일엔 꼭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생일이면 나는 늘 미역국을 끓이게 된다.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예고 없이 들이닥친 더위 앞에선 나도 때론 감정이 들쑥날쑥해진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물통을 바로 꺼내놓지 않기만 해도 화가 불쑥 치밀어 오른다. 그럴 거면서, 그런데도 굳이, 이 더운 주방에서 땀 흘려 미역국을 끓이는 건 뭘까?


그러고 보니 우리 집 미역국은 여름을 좋아한다. 6월부터 8월까지, 생일이 줄줄이 이어진다. 미역국 취향도 제각각이다. 저마다 선호하는 미역국이 있는데, 6월이 생일인 둘째는 맑은 소고기미역국을 좋아한다. 맑은 소고기미역국은 가장 익숙한 레시피다. 국거리용 소고기를 참기름 두른 냄비에 넣고, 중불에서 지글지글 볶는다. 고기 겉면이 익으며 고소한 향이 퍼지기 시작하면, 미리 물에 불려둔 미역을 함께 넣어 달달 볶는다. 그다음, 냄비에 물을 넉넉히 붓고 코인 육수 몇 알을 넣어 감칠맛을 더한다. 맛소금으로 간을 맞춘 뒤, 약한 불에서 뭉근하게 끓이면 투명하고 담백한 미역국이 완성된다.


7월은 남편의 생일이 기다린다. 남편은 들깨 가루를 넣어 뽀얗게 끓인 들깨소고기미역국을 좋아한다. 아들의 맑은 소고기미역국과 기본 조리과정이 같지만, 들깨 가루를 풀어 넣고 끓인다는 게 포인트다. 들깨소고기미역국의 구수함을 살리려면, 친정에서 공수해 온 들깨 가루를 넣고 오래 푹 끓이면 된다.


8월은 내 생일이다. 물론, 미역국도 내가 끓인다. 더운데 미역국쯤 그냥 패스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없으면 왠지 아쉽다. 매년 생일이 다가오면 ‘나도 누가 끓여준 미역국 한번 먹어봤으면…’ 하는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럴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결국은 내가 직접 요리를 하는데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내 생일 미역국만큼은 오롯이 나만의 취향대로 맘껏 끓인다는 점이다.


평소 새로운 음식엔 눈길을 주지 않는 작은아들과 남편도, 이날만큼은 묵묵히 참고 조금은 특별한(?) 나의 미역국을 먹어준다. 바지락, 홍합, 새우, 황태, 굴 등 갖가지 해물을 듬뿍 넣어 바다 향 가득한 미역국을 끓이기도 하고 닭고기나 참치 통조림을 넣어 새로운 미역국으로 변화를 주기도 한다. 완성된 미역국을 식탁에 올리면, 남편과 둘째는 한 숟갈 뜨기도 전에 어김없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먼저 보내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건 나를 위한 음식이니까.




이렇게 우리 집의 여름은, 미역국의 계절이다. 달마다 조금씩 다른 맛의 국물이 끓는다. 가족들의 입맛이 다르고 요리 방식이 달라도, 주방 속에서 내 모습은 비슷하다. 코끝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 어깨까지 돌돌 말린 티셔츠 소매, 제자리를 찾지 못한 식기로 가득 찬 싱크대.


어쩌면,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이 계절에 펄펄 끓는 국을 끓이는 건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바란다. 미역국 한 그릇에 담긴 내 마음이,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 먹는 그 순간, 우리 가족의 가슴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7월에도, 8월에도 나는 여전히 미역을 불릴 것이다. 불같은 내 사랑도 그 안에 함께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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