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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참외가 그립다

그 맛 알지? 맛있는 음식이야기: 참외

by 로니의글적글적




어렸을 때 우리 동네의 풍경은 온통 흰색이었다. 논과 밭 사이사이로 하얀 비닐하우스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햇살을 받은 비닐은 멀리서 보면 마치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하얀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계절보다 앞서 움직였고, 마을은 봄이 오기도 전에 분주해졌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참외 농사를 지었다. 우리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참외는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었다. 참외 모종을 심고 나면 매일 같이 보온덮개를 걷었다 덮었다 하며 하루가 쉴 새 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비닐하우스 안에서 허리를 굽히고 계절과 숨을 맞추다 보면, 어느 날 노란 열매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참외 집 딸로 자랐지만, 정작 농사일을 거든 기억은 거의 없다. 부모님은 늘 “넌 이런 건 몰라도 돼.” 하시며 나를 하우스 밖으로 내보내곤 하셨다. 그때는 그 말이 그저 나를 아이 취급하는 것 같아 못마땅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고된 일을 자식에게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따뜻한 배려였다.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나는 매일같이 냉장고를 뒤적이며 투덜댔다. “우리 집엔 왜 맨날 참외뿐이야? 딸기나 수박 같은 것도 좀 하면 안 돼?” 그러면 엄마는 깊은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참외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면 너도 그런 말 못 해.” 그땐 그 말의 무게를 나는 알지 못했다. 참외가 매일 집에 있는 게 당연하고, 나는 그저 다른 게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나도 쉰을 바라보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문득문득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아진다. 요즘 따라 자주 머릿속을 맴도는 건, 외길 참외 인생을 걸어오신 부모님의 삶이다. 해마다 같은 시기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같은 흙을 만지며, 같은 작물을 키워내던 그 반복된 일상. 그 속에는 어린 시절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부모님의 묵묵한 책임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 같다.


뜨거운 비닐하우스 안에서 늘 고부라져 있던 엄마의 작은 등, 흙먼지를 털며 경운기에서 내리시던 아버지의 굽은 손가락, 참외값이 조금이라도 더 오르길 바라며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던 두 분의 주름진 얼굴까지. 그렇게 힘들게 수확한 참외 덕분에, 우리 오 남매는 모두 대학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께 참외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곧 두 분의 자부심이었고, 자식을 향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이제 팔순을 넘기신 부모님은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으신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오랜 세월 정든 하우스도 문을 닫았다. 매년 봄과 여름이면 당연하듯 집안 가득 쌓이던 참외 상자도 더는 없다. 햇살 가득한 비닐하우스 풍경은 이제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모님이 더는 참외 농사를 짓지 않게 된 지금에서야 참외가 유난히 맛있게 느껴진다. 예전엔 그저 흔한 과일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참외가 생기면 꼭 얇게 깎아 천천히 음미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나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참외 한 알에 담겨 있던 부모님의 노고와 사랑이 얼마나 따뜻하고 귀한 시간이었는지를. 지금 내 안에 남아 있는 노란 기억은, 단지 그리움이 아니라 내가 꼭 안고 살아갈 소중한 삶의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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