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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해서 달콤한, 여름 옥수수

그 맛 알지? 맛있는 음식이야기: 옥수수

by 로니의글적글적




오후 간식으로 옥수수를 삶았다. 냄비 뚜껑을 여는 순간, 하얀 김이 훅 올라오며 주방 안이 구수한 냄새로 가득 찼다.

“다 익었어! 얘들아!”


아이들이 하나둘 식탁으로 모여들었다. 뜨거운 옥수수가 담긴 쟁반을 식탁 위에 내려놓자, 형제는 눈을 반짝였다. 조심스럽게 집게로 옥수수를 집어 든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옥수수를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자신의 얼굴보다 더 크다며 깔깔대다가 또 “삐익, 삐익” 입으로 하모니카 흉내를 내며 장난을 쳤다. 그러다 어느새 옥수수를 호호 불어가며 이를 세우고 알갱이를 하나씩 물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큰아이가 몇 입 먹고는 금세 내려놓았다.

“달긴 한데, 자꾸 이에 껴서 못 먹겠어.”

“엄마, 난 옥수수가 너무 커서 입이 아파.”

작은 아이도 형을 따라 어물쩍 둘러대는 듯했다.


이유는 달랐지만 두 아들 모두 삶은 옥수수 맛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옥수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살짝 불어낸 뒤 한 입 베어 물었다. 톡! 알갱이가 터지면서 고소하고 달큼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물론 이 맛에는 옥수수뿐 아니라 뉴슈가와 소금도 한몫했겠지만. 아이들이 시큰둥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 맛 앞에 무장해제 되었고, 내게 옥수수는 여름의 맛이자 아버지의 손길이었다.




며칠 전, 아이들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친정집에 다녀왔다.

“아버지가 옥수수 좀 따놨더라.”

집으로 돌아가기 전, 엄마는 늘 이것저것 먹거리를 챙겨주시곤 하는데 이번엔 아버지가 옥수수를 준비해 두신 듯했다. 엄마는 김치냉장고 문을 열더니, 가지런히 포장된 비닐봉지 두 개를 꺼내셨다. 봉지 안에는 연둣빛 껍질을 둘러싼 옥수수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껍질 틈새로 살짝 보이는 연노랑 알갱이들은 알이 단단해 보였고, 갈색 수염도 아직 싱싱했다.

“올해 우리 밭에서 딴 첫 옥수수다. 삶으면 진짜 달아.”

거실 한쪽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더운 날씨에도 아버지가 밭에서 하나하나 손수 따셨을 옥수수.





올해 초, 아버지는 또다시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셨다. 벌써 두 번째였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으셨지만, 그 순간만큼은 가족들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는 논농사를 모두 놓으셨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 보니 밭일도 많이 줄이셨는데, 그 와중에도 옥수수만큼은 꼭 챙기신다.

“애들 옥수수 좋아하잖아.”

자식들 입에 뭐라도 맛있는 걸 넣어주고 싶은 그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신 모양이었다.

어릴 적엔 몰랐다. 옥수수 하나가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과 긴 기다림이 필요한지. 그저 여름이면 우리 집 냉장고 한편에 늘 옥수수가 들어 있었고, 엄마는 큼지막한 솥에 삼성당을 넣어 옥수수를 푹 삶아 두셨다. 그러면 나는 심심할 때나 출출해지면 지나가다 하나씩 집어 먹곤 했다.

이제는 그 옥수수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옥수수는 더 이상 배를 채우는 음식이나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한 해의 계절과 아버지의 땀이 모여 완성된 선물이라는 걸 안다. 잘 여문 옥수수 속엔 아버지의 손길과 다정한 마음이 담겨 있다.


해마다 여름이 무르익을 즈음이면, 나는 아버지가 잘 손질해 보내주신 옥수수를 냄비에 넣고 불을 올린다. 노란 알갱이가 구수하게 익어가는 냄새를 맡는 게 그렇게 좋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 비록 우리 집 아이들 입맛엔 시큰둥한 간식일지 몰라도 내게 이 옥수수는 여름 최고의 별미다.


오늘도 단내 가득한 옥수수를 한입 베어 물며,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따가운 햇볕 아래 밭에서 옥수수를 따시던 뒷모습, 옥수수수염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골라내던 손길, 정작 본인은 드시지도 않고 식구들 손에 먼저 옥수수를 쥐여주시던 그 모습까지.

말보다 행동으로 마음을 전하던 아버지의 다정한 기억 덕분에, 나는 이 옥수수가 더 고맙고, 더 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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