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피아노를 참 좋아했었다.
(마치 그 남자를 참 좋아했었다.)처럼 들리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크든 작든 슬럼프를 거친다.
슬럼프를 심하게 겪는 사람은 급기야 악기를 그만두기도 한다.
그러나 연주의 실력과 상관없이,
무대에 섰던 사람들은 무대를 잊지 못한다.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무척 그리워한다.
죽고 못 사는 애인이랑 헤어졌을 때 보다 더 심하게 아픔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정말 사랑했기에 다시는 우연으로라도 마주치지 말자고 하는 연인 같다.
한동안 여러 복잡한 이유로 피아노를 멀리 했다.
나도 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피아노에게 매몰찰 줄이야.
무수하게 쌓여있던 그랜드 피아노 위의 내 악보들.
집안 책장의 2/3를 채우고 있는 그 악보들 위로 먼지가 켜켜이 쌓였다.
싫은 사람 옆에 가는 게 죽도록 괴로운 일인 것처럼
피아노 앞에서 악보를 꺼내 연습하는 일이 그렇게 괴롭고 싫었다.
날마다 10시간 가까이 피아노 연습을 했던 몇 년 전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얼마 전부터 오래 냉담했던 성당에 다시 나갔다.
갑자기 주말에 성당에서 우연히 들은 피아노 솔로 한 곡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전문 연주자의 터치는 아니었지만,
내 마음을 관통하는 피아노 선율에 한동안 펑펑 울었다.
사람도 목소리로 기억하는 나인지라
악기 소리에 매우 민감하다. 심지어는 타인에 대한 좋고 싫음이 목소리로도 결정된다. (사는 데 별 로 도움 안 되는 기준이더라만)
그래서 유독 듣기 힘든 악기가 있는데.
피아노는 언제 들어도 내 귀에 캔디다.
난 정말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
피아노를 처음 시작한 이유도 그 소리가 좋아서였다.
먼지를 털어내고 제일 먼저 고른 악보는 바흐였다.
내가 무인도에 가면 가져갈 단 하나의 음악
골드베르크 변주곡!
다시 연습이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 공감했다.
그렇게 피아노 앞에 다시 앉기가 힘들었는데.
막상 바흐의 악보를 보니
손가락이 슬슬 돌아간다.
오늘은 아리아부터 변주곡 3번까지만 연습한다.
피아니스트들은 손가락 번호가 없는 이 악보를 보고 각자 자기에게 맞는 핑거링을 찾아 연주를 한다.
정답이 없는 삶 속에서 각자의 길을 찾듯이.
오랜만에 핸드폰도 끄고 집중해서 연습하고 나오니 기분이 좋다.
이 좋은 느낌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다시 연습을 해보기로 조심스레 다짐한다.
정말 오랫동안 내 피아노는 외로웠다.
미안하기도 하고
기다려줘서 고맙기도 하다.
냉담한 나를
뚜껑을 절대 안 열었던 나를
기다려준
나의 스타인웨이.
* 세상에서 인체 다음으로 신비한 악보.
어쩜 종이위에 누운 음표들이 살아서 이렇게 울리는지...
골드베르크 변주곡 악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작품번호 BWV. 988
피아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